1
00:00:24,666 --> 00:00:26,333
"다음 몇 편의 TV 영화들은"

2
00:00:26,416 --> 00:00:29,958
"1978년에서 1981년 사이
채널 7에서 방영하기 위해"

3
00:00:30,041 --> 00:00:32,875
"모두 영국에서
제작 및 촬영되었습니다"

4
00:00:32,958 --> 00:00:36,375
"당시에 방영된 이후로는
방영된 바 없습니다"

5
00:00:43,750 --> 00:00:44,625
네

6
00:00:45,583 --> 00:00:48,750
여기는 제가 글을 쓰는
오두막입니다

7
00:00:50,000 --> 00:00:52,875
여기서 지낸 지 30년 됐습니다

8
00:00:52,958 --> 00:00:54,166
"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
외 3편"

9
00:00:54,250 --> 00:00:55,916
아주 중요한 게 있는데

10
00:00:56,000 --> 00:00:59,708
시작하기 전에
필요한 건 모두 갖춰야 합니다

11
00:01:01,083 --> 00:01:05,208
담배는 물론이고
커피와 초콜릿까지요

12
00:01:06,958 --> 00:01:10,875
저는 글 쓰기 전에 반드시
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둡니다

13
00:01:12,916 --> 00:01:16,458
연필은 6자루 있어요
보드도 청소해야 합니다

14
00:01:18,666 --> 00:01:20,083
지우개 가루가 너무 많네요

15
00:01:21,833 --> 00:01:22,666
됐습니다

16
00:01:24,958 --> 00:01:26,875
그리고 드디어 시작합니다

17
00:01:30,125 --> 00:01:33,708
우선 수정할 것들을 수정하죠

18
00:01:36,458 --> 00:01:37,291
그렇지

19
00:01:42,541 --> 00:01:43,375
이건…

20
00:01:47,250 --> 00:01:51,041
헨리 슈거는 41세의
부유한 독신자였다

21
00:01:51,666 --> 00:01:54,625
지금은 세상을 뜬 아버지가
부자였기에 부유했고

22
00:01:54,708 --> 00:01:58,791
이기적인 사람이라 재산을
아내와 나누기 싫어 독신이었다

23
00:01:58,875 --> 00:02:03,291
키는 188cm이고
본인 생각만큼 잘생기진 않았다

24
00:02:03,375 --> 00:02:05,958
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써서

25
00:02:06,041 --> 00:02:08,250
비싼 양복점에서 정장을 맞추고

26
00:02:08,333 --> 00:02:11,666
셔츠도, 구두도
비싼 곳에서 맞췄다

27
00:02:11,750 --> 00:02:14,583
머리는 열흘에 한 번 다듬었는데

28
00:02:14,666 --> 00:02:17,458
그때마다 손톱 손질도
같이 받았다

29
00:02:17,541 --> 00:02:19,083
그가 몰던 페라리 자동차는

30
00:02:19,166 --> 00:02:21,666
시골 집 한 채와
맞먹는 가격이었다

31
00:02:23,291 --> 00:02:27,000
친구들도 모두 부자였고
평생 단 하루도 일해본 적 없었다

32
00:02:28,000 --> 00:02:32,500
바다에 떠다니는 해초마냥
어디서든 볼 수 있는 타입으로

33
00:02:32,583 --> 00:02:36,291
딱히 나쁜 사람도
그렇다고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

34
00:02:37,458 --> 00:02:39,416
인테리어 소품 같았달까

35
00:02:41,375 --> 00:02:43,625
헨리와 같은 부자들에게는

36
00:02:43,708 --> 00:02:45,750
공통점이 있다

37
00:02:45,833 --> 00:02:47,875
더 부유해지겠다는 강한 욕망

38
00:02:48,791 --> 00:02:51,625
천만으로도 2천만으로도
만족하지 못한다

39
00:02:51,708 --> 00:02:54,583
돈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

40
00:02:54,666 --> 00:02:58,250
어느 날 갑자기 빈털터리가
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산다

41
00:02:58,333 --> 00:03:01,583
재산을 불리는 방식도
참 다양하다

42
00:03:01,666 --> 00:03:04,333
주식을 사놓고
등락을 지켜보기도 하고

43
00:03:04,416 --> 00:03:06,875
토지, 미술품
다이아몬드에 투자하거나

44
00:03:06,958 --> 00:03:09,333
룰렛, 블랙잭, 경마도 하고

45
00:03:09,416 --> 00:03:11,416
도박이라면 뭐든지 하기도 한다

46
00:03:11,500 --> 00:03:15,541
헨리 슈거도 그런 유였는데
속임수도 불사했다

47
00:03:16,500 --> 00:03:17,458
어느 여름의 주말

48
00:03:17,541 --> 00:03:21,166
헨리는 런던에서 차를 몰고
윌리엄 W. 경의 집으로 갔다

49
00:03:21,250 --> 00:03:23,583
저택은 웅장했고
주변 경관은 아름다웠지만

50
00:03:23,666 --> 00:03:27,166
헨리가 도착한 토요일엔
비가 쏟아지고 있었다

51
00:03:27,250 --> 00:03:30,458
집주인과 다른 손님들은
게임을 하며 오후를 보내는데

52
00:03:30,541 --> 00:03:34,708
헨리는 우울한 얼굴로
창문을 때리는 빗방울만 바라봤다

53
00:03:34,791 --> 00:03:37,416
헨리는 응접실에서 나와
현관 홀에 들어섰다

54
00:03:38,125 --> 00:03:42,375
정처 없이 집 안을 걷다가
서재로 들어가게 됐다

55
00:03:45,250 --> 00:03:48,916
윌리엄의 부친은 책 수집가였고
그 큰 방의 모든 벽면엔

56
00:03:49,000 --> 00:03:52,291
바닥에서 천장까지 온통
가죽 장정본 책들이 꽂혀 있었다

57
00:03:52,375 --> 00:03:53,708
별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

58
00:03:53,791 --> 00:03:57,166
탐정 소설이나 스릴러만 읽는데
그런 책은 없었으니까

59
00:03:57,250 --> 00:03:58,708
방을 나서려는데

60
00:03:58,791 --> 00:04:01,875
굉장히 색다른 것이
눈에 들어왔다

61
00:04:01,958 --> 00:04:03,458
워낙 두께가 얇아

62
00:04:03,541 --> 00:04:06,541
양옆의 책들보다 튀어나와 있지
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

63
00:04:06,625 --> 00:04:08,166
책을 뽑아 들었다

64
00:04:08,250 --> 00:04:12,166
두꺼운 종이로 표지를 만든
애들 연습장 같았다

65
00:04:12,250 --> 00:04:14,833
짙은 푸른색 색상 표지엔
아무것도 안 적혀 있었다

66
00:04:14,916 --> 00:04:18,750
첫 페이지에 검은 잉크로
정갈하게 쓰여 있는 내용은

67
00:04:18,833 --> 00:04:19,958
"임다드 칸에 대한 보고"

68
00:04:20,041 --> 00:04:21,958
"눈 없이도 볼 수 있는 자
Z.Z. 차터지"

69
00:04:22,041 --> 00:04:23,958
이상하군, 요상해

70
00:04:24,625 --> 00:04:25,541
이게 뭐지?

71
00:04:26,291 --> 00:04:29,750
팔걸이 의자에 앉아
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

72
00:04:29,833 --> 00:04:32,875
헨리가 그 얇은 연습장에서
읽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

73
00:04:37,958 --> 00:04:41,916
내 이름은 Z.Z. 차터지
캘커타 병원 외과 과장이다

74
00:04:42,000 --> 00:04:44,083
1935년 12월 2일 오전

75
00:04:44,166 --> 00:04:46,291
나는 의사 휴게실에서
차를 마시고 있었다

76
00:04:46,375 --> 00:04:49,916
다른 의사 3명과 함께였다
마셜, 미트라, 맥팔레인

77
00:04:50,000 --> 00:04:51,500
노크 소리가 들렸다

78
00:04:51,583 --> 00:04:52,750
'들어와요' 내가 말했다

79
00:04:54,458 --> 00:04:57,750
실례합니다만
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?

80
00:04:57,833 --> 00:04:59,500
'여긴 전용 공간입니다'
내가 말했다

81
00:04:59,583 --> 00:05:01,750
네, 압니다
불쑥 나타나 죄송합니다만

82
00:05:01,833 --> 00:05:04,791
아주 흥미로운 것을
보여드릴까 합니다

83
00:05:04,875 --> 00:05:07,208
우리 모두 짜증 나서
대꾸하지 않았다

84
00:05:08,208 --> 00:05:12,375
여러분, 저는 눈 없이도
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

85
00:05:13,208 --> 00:05:15,625
60대에 왜소한 체격
흰 콧수염을 길렀고

86
00:05:15,708 --> 00:05:18,375
희한하게 검은 털들이
귀에서 자라나 있었다

87
00:05:18,458 --> 00:05:21,291
붕대 50개쯤을 들여서
제 얼굴을 감싸셔도

88
00:05:21,375 --> 00:05:23,500
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

89
00:05:23,583 --> 00:05:27,166
너무 진지한 말투였고
내 안에서 호기심이 일어났다

90
00:05:27,250 --> 00:05:28,250
들어오시죠

91
00:05:35,166 --> 00:05:36,333
좋습니다

92
00:05:37,333 --> 00:05:38,791
마셜 선생이 펼친 손가락 개수는?

93
00:05:38,875 --> 00:05:40,291
- 7개요
- '한 번 더' 내가 말했다

94
00:05:40,375 --> 00:05:41,750
- 9개
- '한 번 더' 내가 말했다

95
00:05:41,833 --> 00:05:42,833
- 3개
- 한 번 더

96
00:05:42,916 --> 00:05:44,291
- 또 3개네요
- 한 번 더

97
00:05:45,250 --> 00:05:46,166
손가락이 없군요

98
00:05:48,458 --> 00:05:49,333
무슨 수를 쓴 거죠?

99
00:05:49,416 --> 00:05:53,333
수를 쓴 게 아니라
오랜 훈련으로 얻은 능력입니다

100
00:05:53,416 --> 00:05:54,708
어떤 훈련이죠?

101
00:05:54,791 --> 00:05:57,208
죄송합니다만
그건 공개할 수 없습니다

102
00:05:58,125 --> 00:05:59,291
뭘 해드리면 되죠?

103
00:05:59,375 --> 00:06:02,333
제가 속해 있는 유랑극단이
오늘 캘커타에 도착했고

104
00:06:02,416 --> 00:06:05,791
오늘 밤 로열팰리스 홀에서
첫 공연이 있습니다

105
00:06:05,875 --> 00:06:07,375
제 공연의 제목은

106
00:06:07,458 --> 00:06:09,708
'임다드 칸, 눈 없이도
볼 수 없는 자'입니다

107
00:06:09,791 --> 00:06:11,750
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

108
00:06:11,833 --> 00:06:13,250
저는 제일 큰 병원에 가서

109
00:06:13,333 --> 00:06:16,791
최대한 철저하고 전문적인
방식으로 눈을 가려주십사 하죠

110
00:06:16,875 --> 00:06:19,125
의사 선생님들께서
해주시지 않으면

111
00:06:19,208 --> 00:06:21,208
사람들이 속임수라고
생각하거든요

112
00:06:21,291 --> 00:06:24,041
그다음엔 거리로 나가
위험한 일을 합니다

113
00:06:24,125 --> 00:06:25,333
동료 의사들을 돌아봤는데

114
00:06:25,416 --> 00:06:28,458
미트라와 맥팔레인은
진료가 있었다, 가봐요

115
00:06:28,541 --> 00:06:31,541
- 마셜 선생은…
- 좋아요, 제대로 해봅시다

116
00:06:31,625 --> 00:06:33,708
아무것도 안 보이게
확실히 가려보자고

117
00:06:33,791 --> 00:06:36,208
정말 친절하시군요
원하시는 대로 해주십시오

118
00:06:36,291 --> 00:06:38,000
'붕대를 감기 전에' 내가 말했다

119
00:06:38,083 --> 00:06:40,250
'부드러우면서 밀도 높은 걸
눈에 얹는 게 좋겠어'

120
00:06:40,333 --> 00:06:42,500
- 밀가루 반죽?
- 좋아, 제과점에 가봐

121
00:06:42,583 --> 00:06:44,375
난 수술실로 모셔가서
눈꺼풀을 봉할게

122
00:06:44,458 --> 00:06:46,916
나는 임다드를 데리고
긴 복도를 지나 수술실로 갔다

123
00:06:47,000 --> 00:06:48,250
'누우시죠' 내가 말했다

124
00:06:48,333 --> 00:06:50,666
나는 선반에서
콜로듐 병을 꺼냈다

125
00:06:50,750 --> 00:06:52,916
이걸로 눈꺼풀을
붙여드리겠습니다

126
00:06:53,000 --> 00:06:54,291
나중에 어떻게 떼죠?

127
00:06:54,375 --> 00:06:57,833
속눈썹 아래에 조심스럽게
알코올을 묻히면 됩니다

128
00:06:57,916 --> 00:07:00,583
마를 때까지 눈을 감고 계세요

129
00:07:00,666 --> 00:07:01,625
2분 후

130
00:07:01,708 --> 00:07:04,041
'눈을 떠보세요' 내가 말했다
당연히 뜨지 못했다

131
00:07:04,125 --> 00:07:08,000
마셜이 가져온 반죽으로
임다드의 한쪽 눈을 덮었다

132
00:07:08,083 --> 00:07:09,333
눈 전체를 덮되

133
00:07:09,416 --> 00:07:12,000
반죽이 눈 주면 피부까지
닿도록 했다

134
00:07:12,083 --> 00:07:13,791
다른 쪽 눈에도 똑같이 했다

135
00:07:13,875 --> 00:07:15,583
반죽 가장자리를 세게 눌렀다

136
00:07:15,666 --> 00:07:17,166
'불편하진 않으세요?'
내가 물었다

137
00:07:17,250 --> 00:07:18,416
전혀요, 감사합니다

138
00:07:18,500 --> 00:07:20,291
'붕대 좀 감아줘' 마셜에게 말했다

139
00:07:20,375 --> 00:07:22,000
손이 끈적거려서

140
00:07:22,083 --> 00:07:24,833
그러지, 우선 이것부터 놓고

141
00:07:24,916 --> 00:07:28,333
마셜이 반죽으로 덮은 눈 위에
물 적신 솜을 얹었다

142
00:07:28,416 --> 00:07:29,375
제대로 붙었다

143
00:07:29,458 --> 00:07:30,416
일어나 주세요

144
00:07:31,125 --> 00:07:34,416
마셜이 7.5cm 너비의 붕대로
얼굴과 머리를 감았다

145
00:07:34,500 --> 00:07:36,833
숨 쉬어야 하니
코는 막지 말아주세요

146
00:07:36,916 --> 00:07:37,750
물론이죠

147
00:07:38,750 --> 00:07:41,500
꽉 맞는 부분은 좀 낄 수도 있어요

148
00:07:44,166 --> 00:07:45,166
어때?

149
00:07:45,250 --> 00:07:46,250
'훌륭하군' 내가 말했다

150
00:07:46,333 --> 00:07:48,708
엄청난 뇌수술을 받은
환자 같았다

151
00:07:48,791 --> 00:07:49,666
어떠신가요?

152
00:07:49,750 --> 00:07:50,833
아주 좋네요

153
00:07:50,916 --> 00:07:53,916
이렇게 꼼꼼하게 해주시다니
정말 훌륭하십니다

154
00:07:54,000 --> 00:07:57,166
임다드 칸은 침대에서 일어나
곧장 문을 향해 갔다

155
00:08:04,291 --> 00:08:05,958
맙소사! 봤어?

156
00:08:06,041 --> 00:08:07,458
문고리를 단번에 잡았다

157
00:08:07,541 --> 00:08:08,958
마셜 입가의 웃음이 사라졌다

158
00:08:09,541 --> 00:08:12,583
임다드는 정상적인 자세로
빠르게 복도를 걸어갔다

159
00:08:12,666 --> 00:08:16,000
우린 5m쯤 뒤에서 따라갔는데
왠지 섬뜩했다

160
00:08:16,083 --> 00:08:19,000
붕대 감은 거대한 머리로
저렇게 경쾌하게 걷다니

161
00:08:19,083 --> 00:08:20,166
'저걸 봤어!' 내가 소리쳤다

162
00:08:20,250 --> 00:08:22,875
'저 트롤리를 본 거야
굉장하군'

163
00:08:22,958 --> 00:08:24,333
마셜은 대답이 없었다

164
00:08:24,416 --> 00:08:26,500
충격으로 굳은 얼굴이었다

165
00:08:27,250 --> 00:08:29,708
임다드는 계단도
거침없이 내려갔다

166
00:08:29,791 --> 00:08:31,208
난간조차 잡지 않았다

167
00:08:31,291 --> 00:08:34,166
계단에서 마주친 몇 사람은
저런 반응을 보였다

168
00:08:34,875 --> 00:08:38,125
계단을 다 내려가서는
정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

169
00:08:38,833 --> 00:08:41,166
마셜과 나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

170
00:08:41,250 --> 00:08:44,583
출입문 밖에는 100명쯤 되는
맨발의 아이들이 소릴 지르며

171
00:08:44,666 --> 00:08:46,166
하얀 머리통의 남자에게
몰려들었다

172
00:08:46,250 --> 00:08:48,500
남자는 두 팔을 번쩍 들어
인사하고

173
00:08:48,583 --> 00:08:51,833
곧장 자전거 쪽으로 가 타더니
페달을 밟아 8자 모양을 그렸다

174
00:08:51,916 --> 00:08:54,708
맨발의 아이들은 환호하고
웃으며 그를 따라갔다

175
00:08:54,791 --> 00:08:57,583
그는 속도를 올려
혼잡한 도로로 들어갔고

176
00:08:57,666 --> 00:09:00,916
차들은 빵빵대며
자전거 주위를 쌩쌩 달렸다

177
00:09:01,000 --> 00:09:02,625
자전거 실력이 대단했다

178
00:09:02,708 --> 00:09:04,708
그렇게 잠시 시야에 머물다가

179
00:09:04,791 --> 00:09:06,750
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

180
00:09:06,833 --> 00:09:08,708
'믿을 수가 없군' 마셜이 말했다

181
00:09:08,791 --> 00:09:10,375
믿을 수가 없군

182
00:09:10,458 --> 00:09:11,958
'나도 그래' 내가 말했다

183
00:09:12,041 --> 00:09:14,250
우리 방금 기적을 본 것 같아

184
00:09:14,333 --> 00:09:16,875
그 후 온종일 바쁘게 진료하고

185
00:09:16,958 --> 00:09:19,541
오후 6시에 집에 가서
옷을 갈아입었다

186
00:09:19,625 --> 00:09:21,000
찬물로 오래 샤워하고

187
00:09:21,083 --> 00:09:24,500
허리에 수건 하나 두른 채
베란다에서 위스키 소다를 마셨다

188
00:09:24,583 --> 00:09:27,500
그리고 7시 10분 전
로열팰리스 홀에 도착했다

189
00:09:27,583 --> 00:09:29,000
공연은 2시간 동안 계속됐다

190
00:09:29,083 --> 00:09:30,791
놀랍게도 재미있었다

191
00:09:30,875 --> 00:09:32,458
저글링, 뱀 공연, 불 쇼

192
00:09:32,541 --> 00:09:35,666
양날칼을 위장까지
집어넣는 칼 쇼까지

193
00:09:35,750 --> 00:09:37,458
마지막으로 트럼펫 팡파르와 함께

194
00:09:37,541 --> 00:09:40,000
우리 친구 임다드 칸이
무대에 올랐다

195
00:09:40,083 --> 00:09:42,291
관중 몇이 무대에 올라가
안대를 씌우자

196
00:09:42,375 --> 00:09:45,041
임다드는 어린 소년의
몸 주위로 칼을 던지고

197
00:09:45,125 --> 00:09:47,541
머리 위의 깡통을
총으로 쏘아 맞혔다

198
00:09:47,625 --> 00:09:51,458
그리고 마침내 붕대를 감은 머리에
금속 드럼통이 씌워졌다

199
00:09:51,541 --> 00:09:55,291
소년이 임다드의 양손에
바늘과 실을 각각 쥐여줬다

200
00:09:55,375 --> 00:09:57,708
그리고 커다란 돋보기를
그 손 앞에 갖다 댔다

201
00:09:57,791 --> 00:09:59,375
한 번의 실수도 없이

202
00:09:59,458 --> 00:10:02,125
깔끔하게 바늘에 실을 꿰었다

203
00:10:07,208 --> 00:10:08,208
놀랄 '노'자였다

204
00:10:10,583 --> 00:10:13,125
무대 뒤로 가 보니
임다드가 스툴에 조용히 앉아

205
00:10:13,208 --> 00:10:14,625
분장을 지우고 있었다

206
00:10:14,708 --> 00:10:16,416
궁금해서 오셨군요

207
00:10:16,500 --> 00:10:17,666
'너무 궁금하네요' 내가 말했다

208
00:10:17,750 --> 00:10:21,583
귀에서 자라난 검은 털에
다시 한번 놀랐다

209
00:10:21,666 --> 00:10:23,916
그런 귀는 본 적이 없었다

210
00:10:24,000 --> 00:10:26,458
제안할 게 있습니다
제가 전문 작가는 아닙니다만

211
00:10:26,541 --> 00:10:30,083
눈 없이 보는 능력을 갖게 된
경위를 말씀해 주시면

212
00:10:30,166 --> 00:10:31,833
그대로 받아적어서

213
00:10:31,916 --> 00:10:34,833
'브리티시 메디컬 저널'에
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

214
00:10:34,916 --> 00:10:36,125
유명 잡지도 가능하겠죠

215
00:10:36,208 --> 00:10:38,375
그러면 유명해지는 데에
도움이 될까요?

216
00:10:38,458 --> 00:10:40,416
- 큰 도움이 될 겁니다
- 잘됐네요

217
00:10:40,500 --> 00:10:43,333
환자들 병력을 기록할 때 쓰는
나만의 속기법으로

218
00:10:43,416 --> 00:10:46,500
그날 밤 임다드 칸이 해준
모든 이야기를 받아적었다

219
00:10:46,583 --> 00:10:48,750
그가 말한 그대로
여러분께 전하려 한다

220
00:10:50,041 --> 00:10:52,208
"그날 밤 임다드 칸이
내게 해준 모든 이야기"

221
00:10:52,291 --> 00:10:53,541
"(토씨 하나까지 같음)"

222
00:10:55,708 --> 00:10:58,791
나는 1873년
카슈미르에서 태어났습니다

223
00:10:58,875 --> 00:11:01,916
아버지는 국유 철도회사의
검표원이셨지요

224
00:11:02,000 --> 00:11:05,291
어느 날, 학교에서
마술 공연을 봤습니다

225
00:11:05,375 --> 00:11:06,833
넋 놓고 봤어요

226
00:11:06,916 --> 00:11:08,833
2주 후, 저축한 돈을 모두 들고

227
00:11:08,916 --> 00:11:11,375
집을 나와
유랑극단에 들어갔습니다

228
00:11:11,458 --> 00:11:14,708
1886년, 13세 때의 일입니다

229
00:11:14,791 --> 00:11:15,791
3년 동안

230
00:11:15,875 --> 00:11:18,500
극단과 함께
펀자브 전역을 돌았습니다

231
00:11:18,583 --> 00:11:21,125
그즈음엔 극단에서
가장 인기가 많아졌죠

232
00:11:21,208 --> 00:11:23,666
버는 돈은 줄곧 저축했고

233
00:11:23,750 --> 00:11:27,541
그 액수가 3천 루피도 넘었습니다

234
00:11:27,625 --> 00:11:29,333
그때쯤, 소문을 들었는데

235
00:11:29,416 --> 00:11:32,958
한 유명한 요가 수행자가
공중부양 능력을 얻었다더군요

236
00:11:33,041 --> 00:11:34,666
그 수행자가 기도할 때면

237
00:11:34,750 --> 00:11:39,125
바닥에서 최소 45cm 이상
몸 전체가 떠오른다는 겁니다

238
00:11:39,208 --> 00:11:40,291
강렬한 인상을 받았죠

239
00:11:41,375 --> 00:11:42,208
콧수염은?

240
00:11:44,666 --> 00:11:46,000
유랑극단을 나와서

241
00:11:46,083 --> 00:11:49,375
갠지스강 유역의
작은 마을로 갔습니다

242
00:11:49,458 --> 00:11:51,375
그 수행자가 거기에 산다더군요

243
00:11:51,458 --> 00:11:54,333
어느 날, 그리 멀지 않은
깊은 정글에 혼자 사는

244
00:11:54,416 --> 00:11:57,583
어떤 은둔자를 만났다는
여행자의 얘기를 들었습니다

245
00:11:57,666 --> 00:11:58,958
그거면 충분했죠

246
00:11:59,041 --> 00:12:01,166
마차를 빌리려고
당장 뛰쳐나갔습니다

247
00:12:02,083 --> 00:12:03,708
마부와 흥정하는데

248
00:12:03,791 --> 00:12:06,291
한 남자가 다가와서는
자기도 그쪽으로 간다며

249
00:12:06,375 --> 00:12:09,291
마차를 같이 타고
돈을 나눠 내자는 겁니다

250
00:12:09,375 --> 00:12:12,166
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요?

251
00:12:12,250 --> 00:12:13,541
얘길 나누다 보니

252
00:12:13,625 --> 00:12:16,625
바로 그 위대한 요가 수행자의
제자였고

253
00:12:16,708 --> 00:12:19,541
스승을 만나러 가던 길에
절 만난 거였습니다

254
00:12:19,625 --> 00:12:20,458
불쑥 소리쳤죠

255
00:12:20,541 --> 00:12:23,416
'내가 찾는 사람입니다!
만날 수 있을까요?'

256
00:12:23,500 --> 00:12:26,291
동행자가 저를 가만히 보더니

257
00:12:26,375 --> 00:12:28,458
그건 안 된다고 하더군요

258
00:12:28,541 --> 00:12:31,750
그 이후로 뭘 물어도
대답해 주지 않았습니다

259
00:12:31,833 --> 00:12:34,416
그래도 한 가지는 알아냈죠

260
00:12:34,500 --> 00:12:37,625
수행자가
명상을 시작하는 시간을요

261
00:12:37,708 --> 00:12:41,958
동행자는 마차를 세우더니
내려서 가버렸습니다

262
00:12:42,041 --> 00:12:44,625
저는 계속 가는 척하다가
모퉁이를 돌자마자

263
00:12:44,708 --> 00:12:46,875
마차에서 내려
길을 되짚어갔습니다

264
00:12:46,958 --> 00:12:49,750
남자는 정글 속으로
사라지고 없었죠

265
00:12:49,833 --> 00:12:51,750
덤불 속에서 소리가 나더군요

266
00:12:51,833 --> 00:12:54,125
'그 사람이 아니라면
호랑이겠군' 생각했죠

267
00:12:54,208 --> 00:12:56,750
'곧 달려들어 날 물어뜯겠지'

268
00:12:56,833 --> 00:12:59,583
'갈기갈기 뜯겨
잡아먹히고 말 거야'

269
00:13:00,958 --> 00:13:01,833
그 사람이었습니다

270
00:13:04,125 --> 00:13:07,583
그 사람이 걸어가는 경로엔
길이라곤 없었습니다

271
00:13:07,666 --> 00:13:11,791
커다란 대나무와 무성한 풀들을
헤치고 나아갔죠

272
00:13:11,875 --> 00:13:15,833
저는 100m쯤 뒤에서
숨죽인 채 따라갔습니다

273
00:13:15,916 --> 00:13:18,916
시야에서 놓치는 일이
다반사였는데

274
00:13:19,000 --> 00:13:21,458
그럴 때면 발소리를 듣고
따라갔습니다

275
00:13:21,541 --> 00:13:24,750
이 따라잡기 게임은
30분쯤 지속됐는데

276
00:13:24,833 --> 00:13:27,666
갑자기 발소리가
뚝 끊겨버렸습니다

277
00:13:27,750 --> 00:13:29,625
멈춰 서서 귀 기울였죠

278
00:13:29,708 --> 00:13:31,583
그 순간 무성한 덤불 사이로

279
00:13:31,666 --> 00:13:34,166
좁은 공터와
작은 움막 2채가 보였습니다

280
00:13:34,250 --> 00:13:35,458
두근거렸죠

281
00:13:35,541 --> 00:13:37,833
가까운 움막 옆엔 물웅덩이가 있고

282
00:13:37,916 --> 00:13:39,916
그 옆엔 기도용 매트가
그리고 뒤쪽으로는

283
00:13:40,000 --> 00:13:44,208
잎이 무성한 아름댭고
커다란 바오바브나무가 있었죠

284
00:13:44,291 --> 00:13:46,583
정오의 열기를 견디며
기다렸습니다

285
00:13:46,666 --> 00:13:49,500
습기 가득한 오후의
무거운 열기도 버텨냈죠

286
00:13:49,583 --> 00:13:50,958
5시가 되어 갈 때

287
00:13:51,041 --> 00:13:54,416
조용히 나무에 올라가
무성한 잎 사이에 숨었습니다

288
00:13:54,500 --> 00:13:56,625
마침내 수행자가 움막에서 나와

289
00:13:56,708 --> 00:13:58,541
매트 위에
가부좌를 틀고 앉았습니다

290
00:13:58,625 --> 00:14:01,208
움직임 하나하나가
조용하고 부드러웠죠

291
00:14:01,291 --> 00:14:03,791
무릎에 손바닥을 대고 앉아

292
00:14:03,875 --> 00:14:06,041
코로 긴 숨을 내뱉었는데

293
00:14:06,125 --> 00:14:09,875
제 눈에는 이미 수행자의 몸을
감싸는 빛이 보였습니다

294
00:14:09,958 --> 00:14:13,291
그 자세로 14분 동안
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죠

295
00:14:13,375 --> 00:14:17,000
그리고 제 이 두 눈으로
분명히 봤습니다

296
00:14:17,083 --> 00:14:19,166
그의 몸이 천천히
바닥에서 떠올랐죠

297
00:14:20,666 --> 00:14:24,333
30cm, 40cm, 45cm, 50cm

298
00:14:25,083 --> 00:14:27,166
매트로부터 60cm

299
00:14:27,250 --> 00:14:28,958
나무 위에서 혼잣말을 했죠

300
00:14:29,041 --> 00:14:32,125
'내 눈앞에
공중부양하는 사람이 있어'

301
00:14:33,458 --> 00:14:37,416
제 시계로 재보니 46분 동안
공중부양 자세를 유지했습니다

302
00:14:37,500 --> 00:14:39,708
그러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가

303
00:14:39,791 --> 00:14:42,333
엉덩이가 다시 매트에 닿았습니다

304
00:14:42,416 --> 00:14:44,916
전 나무에서 내려가
곧장 달려갔죠

305
00:14:45,000 --> 00:14:47,291
수행자는 손발을 씻고 있었습니다

306
00:14:47,375 --> 00:14:49,583
'언제부터 거기 있었지?'
수행자가 쏘아붙였습니다

307
00:14:49,666 --> 00:14:52,208
그러더니 벽돌을 집어
제 쪽으로 세게 던졌고

308
00:14:52,291 --> 00:14:54,791
제 정강이에 맞은 벽돌은
둘로 쪼개졌습니다

309
00:14:54,875 --> 00:14:57,000
흉터도 있으니 보여드리죠

310
00:14:59,916 --> 00:15:01,708
그런데 그게 행운이었어요

311
00:15:01,791 --> 00:15:04,791
수행자는 이성을 잃고
벽돌을 날려선 안 되니까요

312
00:15:04,875 --> 00:15:09,250
굴욕과 후회 속에
자신에게 크게 실망한 수행자는

313
00:15:09,333 --> 00:15:12,625
저를 제자로 받아줄 수는 없지만

314
00:15:12,708 --> 00:15:15,541
절 공격한 데 대한 사죄의 의미로

315
00:15:15,625 --> 00:15:17,708
비공식적인 가르침을 주겠다더군요

316
00:15:17,791 --> 00:15:20,125
공격당할 만한 짓을 했는데요

317
00:15:20,208 --> 00:15:22,041
때는 1890년

318
00:15:22,125 --> 00:15:24,041
17세가 되기 조금 전이었습니다

319
00:15:26,000 --> 00:15:28,250
수행자는 어떤 가르침을
주었냐고요?

320
00:15:28,333 --> 00:15:29,875
바로 이겁니다

321
00:15:29,958 --> 00:15:34,541
정신이란 아주 복잡한 것이다
동시에 수천 가지를 생각하지

322
00:15:34,625 --> 00:15:37,250
주변에서 보이는 것들
소리들, 냄새들

323
00:15:37,333 --> 00:15:40,208
생각나는 것들
생각 안 하려 애쓰는 것들

324
00:15:40,291 --> 00:15:42,583
정신을 집중하는 법을 배워야 돼

325
00:15:42,666 --> 00:15:45,916
딱 한 가지, 오직 한 가지만
눈앞에 그리는 거지

326
00:15:46,000 --> 00:15:50,458
노력하면 원하는 한 가지 대상에만
정신을 집중하게 될 수도 있다

327
00:15:50,541 --> 00:15:52,458
약 3분 30초 정도

328
00:15:52,541 --> 00:15:55,625
매일 열심히 수행한다면
20년쯤 걸릴 것이다

329
00:15:55,708 --> 00:15:57,291
'20년이요?' 제가 외쳤죠

330
00:15:57,375 --> 00:15:59,083
그래, 더 걸릴 수도 있어

331
00:15:59,166 --> 00:16:01,875
보통 20년쯤 걸리지
성공 못 할 수도 있고

332
00:16:01,958 --> 00:16:03,541
그때쯤이면 늙었을 텐데요

333
00:16:03,625 --> 00:16:06,416
걸리는 시간은 다 달라
10년일 수도, 30년일 수도

334
00:16:06,500 --> 00:16:08,208
아주 드문 경우지만

335
00:16:08,291 --> 00:16:12,250
특별한 능력이 있어서
1, 2년 안에 성공하기도 하는데

336
00:16:12,333 --> 00:16:14,250
십억 명 중 한 명이고 넌 아니야

337
00:16:14,333 --> 00:16:16,625
정신을 집중하는 게
그렇게 어려운 일…

338
00:16:16,708 --> 00:16:19,458
불가능에 가깝지, 해보겠나?

339
00:16:19,541 --> 00:16:21,166
눈 감고 뭔가 생각해 봐

340
00:16:21,250 --> 00:16:24,291
하나의 사물을 생각하고
눈앞에 형상을 그리는 거야

341
00:16:24,375 --> 00:16:27,750
몇 초 후면 집중이 흐트러져서
다른 생각들이 튀어나오지

342
00:16:27,833 --> 00:16:29,541
아주 어려운 일이야

343
00:16:29,625 --> 00:16:31,625
위대하고 현명한 수행자는
이렇게 말하였노라

344
00:16:33,708 --> 00:16:36,500
그렇게 수련을 시작했습니다

345
00:16:37,083 --> 00:16:39,500
매일 저녁 눈을 감고 앉아

346
00:16:39,583 --> 00:16:41,916
가장 사랑하는 이의
모습을 떠올렸지요

347
00:16:42,000 --> 00:16:45,333
열 살 때 혈액 질환으로
사망한 제 형입니다

348
00:16:45,416 --> 00:16:49,208
형의 얼굴에 집중하다가
정신이 흐트러지는 즉시

349
00:16:49,291 --> 00:16:53,458
수련을 멈추고 몇 분간 휴식한 후
다시 시작했습니다

350
00:16:53,541 --> 00:16:55,291
5년간 매일 수련한 결과

351
00:16:55,375 --> 00:16:58,208
형의 얼굴에만
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

352
00:16:58,291 --> 00:16:59,750
1분 30초가 되었습니다

353
00:16:59,833 --> 00:17:01,166
진전이 있었죠

354
00:17:04,791 --> 00:17:08,833
그즈음, 마술 공연으로
꽤 큰 돈을 벌기 시작했죠

355
00:17:08,916 --> 00:17:11,041
훌륭한 손재주를 타고났거든요

356
00:17:11,125 --> 00:17:13,708
그래도 수련은 계속했습니다

357
00:17:13,791 --> 00:17:17,583
어디에 있든 매일 저녁이면
조용한 곳에 앉아

358
00:17:17,666 --> 00:17:20,333
형의 얼굴에 정신을 집중했죠

359
00:17:20,416 --> 00:17:23,583
때로는 촛불을 켜고
불꽃을 들여다봤습니다

360
00:17:23,666 --> 00:17:27,041
아시겠지만 촛불은
3개의 부분으로 나뉘죠

361
00:17:27,125 --> 00:17:29,541
위쪽의 노란 불꽃
중간의 연보라색 불꽃

362
00:17:29,625 --> 00:17:30,875
그리고 안쪽의 검은 부분

363
00:17:30,958 --> 00:17:35,458
얼굴에서 40cm 거리
정확히 눈높이에 촛불을 뒀습니다

364
00:17:35,541 --> 00:17:38,458
눈을 위아래로 움직이느라
눈 근육을 움직이는 일조차

365
00:17:38,541 --> 00:17:39,916
피하기 위해서였죠

366
00:17:40,000 --> 00:17:44,041
검은 부분을 노려보다 보면
주변 모든 게 사라지는데

367
00:17:44,125 --> 00:17:48,000
그때 눈을 감고
형의 얼굴에 집중했습니다

368
00:17:48,916 --> 00:17:52,041
1907년, 34세에는

369
00:17:52,125 --> 00:17:56,125
정신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
3분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

370
00:17:56,208 --> 00:17:59,458
그리고 그때쯤 제게 어떤 능력이
있음을 알게 됐습니다

371
00:17:59,541 --> 00:18:01,291
뭔가 묘한 느낌이었는데

372
00:18:01,375 --> 00:18:04,375
눈을 감고
강렬한 의지를 불태우며

373
00:18:04,458 --> 00:18:05,750
뭔가를 열심히 쳐다보면

374
00:18:05,833 --> 00:18:08,541
보고 있는 대상의
윤곽이 보였습니다

375
00:18:08,625 --> 00:18:10,583
그 수행자의 말이 생각나더군요

376
00:18:10,666 --> 00:18:14,250
'어떤 신성한 이들은
집중력이 극도로 발달한 나머지'

377
00:18:14,333 --> 00:18:16,333
'눈을 감고도
볼 수 있다고 하더라'

378
00:18:17,083 --> 00:18:21,416
매일 밤, 촛불 수련을 마친 후

379
00:18:21,500 --> 00:18:24,333
커피를 한 잔 마신 다음
눈을 가리고

380
00:18:24,416 --> 00:18:26,875
의자에 앉아 눈을 쓰지 않고
보는 연습을 했습니다

381
00:18:26,958 --> 00:18:29,125
카드 한 벌로 시작했죠

382
00:18:29,208 --> 00:18:31,333
카드 뒷면을 보며
숫자를 추측하는 건데

383
00:18:31,416 --> 00:18:33,583
처음부터 성공률은
60%나 됐습니다

384
00:18:33,666 --> 00:18:37,625
그 후에는 지도와 항법표를 사다가
벽 여기저기에 붙였습니다

385
00:18:37,708 --> 00:18:42,083
눈을 가린 채 몇 시간 동안
작은 글씨들을 읽으려 애썼죠

386
00:18:42,166 --> 00:18:46,291
그렇게 8년 동안
매일 같은 훈련을 했습니다

387
00:18:46,375 --> 00:18:49,000
1915년이 됐을 땐
책을 처음부터 끝까지

388
00:18:49,083 --> 00:18:50,958
눈을 가린 채 읽을 수 있게 됐죠

389
00:18:51,041 --> 00:18:52,291
해낸 겁니다!

390
00:18:52,375 --> 00:18:54,291
마침내 능력이 생겼어요

391
00:18:55,833 --> 00:18:58,541
아시다시피 그 능력으로
마술 공연을 하게 됐는데

392
00:18:58,625 --> 00:19:01,791
관중은 좋아하긴 해도
믿진 않았죠, 지금까지도요

393
00:19:01,875 --> 00:19:05,333
선생님처럼 직접 꼼꼼하게
제 눈을 가려준 의사들조차

394
00:19:05,416 --> 00:19:08,375
눈 없이 앞을 본다는 걸
믿으려 하지 않죠

395
00:19:08,458 --> 00:19:11,708
형상을 뇌에 전달하는
다른 방법이 있다는 걸 몰라요

396
00:19:11,791 --> 00:19:13,208
임다드 칸은 조용해졌다

397
00:19:13,291 --> 00:19:14,208
피로해 보였다

398
00:19:14,291 --> 00:19:15,666
'어떤 방법이 있나요?'
내가 물었다

399
00:19:17,750 --> 00:19:19,333
솔직히 저도 모릅니다

400
00:19:21,083 --> 00:19:23,958
신체의 다른 부분이 보는 거죠

401
00:19:24,041 --> 00:19:24,958
어느 부분이요?

402
00:19:35,125 --> 00:19:36,666
그날 밤, 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

403
00:19:36,750 --> 00:19:39,833
과학자들이 알면
난리가 날 만한 일이었다

404
00:19:39,916 --> 00:19:41,875
현존하는 가장 가치 있는
사람이 분명했다

405
00:19:41,958 --> 00:19:45,625
그 원리를 알아내야 했다
생물학이든, 화학이든, 마법이든

406
00:19:45,708 --> 00:19:48,375
눈으로 보지 않고도
형상을 뇌로 전하는 원리를

407
00:19:48,458 --> 00:19:51,833
맹인이 보고, 농인이 듣고
뭐든 가능할지도 모른다

408
00:19:51,916 --> 00:19:54,541
이 엄청난 사람의 존재가
묻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

409
00:19:54,625 --> 00:19:58,333
그날 밤 임다드 칸이 한 얘기를
모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

410
00:19:58,416 --> 00:20:00,416
쉬지 않고 5시간 동안 썼다

411
00:20:03,125 --> 00:20:06,583
아침 8시에 병원에 갔다
중요한 부분은 모두 적은 후였다

412
00:20:06,666 --> 00:20:08,041
방금 여러분이 읽은 부분이다

413
00:20:08,125 --> 00:20:10,958
마셜 선생은 휴식 시간에야
만날 수 있었다

414
00:20:11,041 --> 00:20:13,291
그 10분 동안
최대한 많은 얘길 해줬다

415
00:20:13,375 --> 00:20:15,916
'극장에 가볼 거야' 내가 말했다
'이대로 놓칠 순 없어'

416
00:20:16,000 --> 00:20:17,291
나도 같이 가지

417
00:20:17,375 --> 00:20:19,875
오후 6시 45분, 차를 몰고
로열팰리스 홀로 갔다

418
00:20:19,958 --> 00:20:22,041
주차하고 극장 쪽으로 걸어갔다

419
00:20:22,541 --> 00:20:24,250
'뭔가 이상해' 내가 말했다

420
00:20:24,333 --> 00:20:26,625
관람객도 없고 문도 닫혀 있었다

421
00:20:26,708 --> 00:20:30,666
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
그 위에 뭔가 적혀 있었다

422
00:20:30,750 --> 00:20:32,833
'오늘 공연 취소'

423
00:20:33,875 --> 00:20:37,208
잠긴 문 옆의 수위에게 물었다
'어떻게 된 건가요?'

424
00:20:37,291 --> 00:20:38,583
사람이 죽었습니다

425
00:20:38,666 --> 00:20:39,500
'누가요?'

426
00:20:39,583 --> 00:20:40,958
물론 누군지 알고 있었다

427
00:20:41,041 --> 00:20:42,916
눈 없이도 보는 남자입니다

428
00:20:43,666 --> 00:20:45,208
'어쩌다가요?' 내가 외쳤다

429
00:20:45,291 --> 00:20:47,250
잠자리에 들었다가
깨어나지 않았습니다

430
00:20:48,208 --> 00:20:49,375
흔히 있는 일이죠

431
00:20:52,750 --> 00:20:54,416
차로 천천히 돌아갔다

432
00:20:59,125 --> 00:21:01,500
엄청난 슬픔과 분노가 밀려들었다

433
00:21:01,583 --> 00:21:03,583
그 귀한 사람 곁에서
떨어지지 말걸

434
00:21:03,666 --> 00:21:05,500
내 침실을 내주고 돌볼걸

435
00:21:05,583 --> 00:21:07,000
임다드 칸은 기적을 행했고

436
00:21:07,083 --> 00:21:11,333
범인들은 닿을 수 없는
신비로운 힘을 지닌 이였다

437
00:21:11,416 --> 00:21:13,083
그런 그가 죽었다

438
00:21:13,166 --> 00:21:14,833
'끝났군' 마셜이 말했다

439
00:21:15,625 --> 00:21:16,541
끝났군

440
00:21:17,500 --> 00:21:18,500
'그래' 내가 말했다

441
00:21:19,833 --> 00:21:20,750
'끝났어'

442
00:21:25,625 --> 00:21:28,083
임다드 칸과의 두 번의 만남에서
일어난 모든 일을

443
00:21:28,166 --> 00:21:30,291
사실 그대로 정확하게
기록하는 바이다

444
00:21:33,416 --> 00:21:34,625
이런

445
00:21:35,708 --> 00:21:37,791
아주 흥미로운 얘기로군

446
00:21:39,166 --> 00:21:41,333
정말 엄청난 정보잖아

447
00:21:42,916 --> 00:21:44,333
내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겠어

448
00:22:04,125 --> 00:22:06,541
헨리가 말한 정보라 함은

449
00:22:06,625 --> 00:22:08,750
임다드 칸이 연습을 통해

450
00:22:08,833 --> 00:22:11,833
뒷면만 보고도 무슨 카드인지
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

451
00:22:11,916 --> 00:22:14,541
앞서 언급했듯
정직하지 못한 도박꾼으로서

452
00:22:14,625 --> 00:22:16,291
헨리는 직감했던 것이다

453
00:22:16,375 --> 00:22:18,083
큰돈을 벌 수 있다는 걸

454
00:22:18,166 --> 00:22:20,500
아래층 식기실로 내려가

455
00:22:20,583 --> 00:22:23,208
초와 촛대, 자를 받아서는

456
00:22:23,291 --> 00:22:27,041
침실로 가져가 문을 잠그고
커튼을 친 다음 불을 껐다

457
00:22:27,125 --> 00:22:29,625
화장대에 초를 올려놓고
의자를 가져왔다

458
00:22:29,708 --> 00:22:33,083
초의 심지가 자기 눈높이와
정확히 맞는 걸 보고 만족했다

459
00:22:33,166 --> 00:22:37,000
자를 사용해 얼굴과 초 사이의
거리를 40cm로 맞췄다

460
00:22:37,083 --> 00:22:38,541
책에 적힌 대로였다

461
00:22:38,625 --> 00:22:42,125
임다드 칸은 가장 사랑하는 이의
얼굴을 떠올렸는데

462
00:22:42,208 --> 00:22:44,666
그의 경우엔 죽은 형이었다

463
00:22:44,750 --> 00:22:46,458
헨리에겐 형제가 없었다

464
00:22:47,041 --> 00:22:49,958
본인 얼굴을 떠올리기로 했다

465
00:22:56,750 --> 00:22:59,875
촛불 가장 안쪽의
작은 검은 부분을 바라보자

466
00:22:59,958 --> 00:23:01,583
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

467
00:23:01,666 --> 00:23:04,791
머릿속이 완전히 텅 비면서
뇌가 움직임을 멈췄고

468
00:23:04,875 --> 00:23:08,083
갑자기 불타는 공허와도 같은
촛불의 작은 검은 부분이

469
00:23:08,166 --> 00:23:11,708
편하고 아늑하게
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

470
00:23:12,291 --> 00:23:14,500
지속된 시간은 겨우 15초였다

471
00:23:14,583 --> 00:23:16,791
하지만 그 후로 어디서 뭘 하든

472
00:23:16,875 --> 00:23:20,291
이런 촛불 훈련을
하루 5번씩은 꼭 했다

473
00:23:20,375 --> 00:23:24,041
이렇게 열정적으로 무슨 일에
집중한 것은 처음이었고

474
00:23:24,125 --> 00:23:26,291
그 성과는 매우 놀라웠다

475
00:23:27,166 --> 00:23:28,166
6개월 후에는

476
00:23:28,250 --> 00:23:31,625
머릿속 자신의 얼굴에만
3분 동안 집중할 수 있었다

477
00:23:31,708 --> 00:23:34,000
그 어떤 다른 생각도
떠오르지 않았다

478
00:23:34,625 --> 00:23:36,166
'나였어' 헨리는 생각했다

479
00:23:36,250 --> 00:23:38,375
'엄청난 속도로
요가 수련을 완성할 수 있는'

480
00:23:38,458 --> 00:23:40,791
'십억 명 중 한 명이 나였어'

481
00:23:41,333 --> 00:23:44,000
1년이 다 돼 갈 즈음엔
5분 30초로 늘어났다

482
00:23:45,250 --> 00:23:46,375
때가 왔다

483
00:23:50,666 --> 00:23:52,833
헨리의 런던 집 거실, 자정

484
00:23:52,916 --> 00:23:54,458
헨리는 기대감에 몸을 떨며

485
00:23:54,541 --> 00:23:57,291
처음으로 카드 한 벌을
뒷면이 보이도록 놓고

486
00:23:57,375 --> 00:23:59,041
맨 위의 카드에 집중한다

487
00:23:59,125 --> 00:24:02,833
처음엔 빨간 선들로 이뤄진
카드 뒷면의 무늬만이 보인다

488
00:24:02,916 --> 00:24:05,750
세계적으로 가장 흔한
카드 뒷면 디자인일 것이다

489
00:24:05,833 --> 00:24:09,375
헨리는 곧 카드의 반대쪽 면에
집중하기 시작한다

490
00:24:09,458 --> 00:24:13,500
보이지 않는 카드 아래쪽에
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

491
00:24:13,583 --> 00:24:16,416
30초가 흐른다
1분, 2분, 3분

492
00:24:16,500 --> 00:24:17,916
헨리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

493
00:24:18,000 --> 00:24:20,500
고도로 발달된 집중력은
가히 완벽하다

494
00:24:20,583 --> 00:24:22,500
카드 반대쪽 면을 연상한다

495
00:24:22,583 --> 00:24:25,000
그 어떤 다른 생각도
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한다

496
00:24:25,083 --> 00:24:27,375
4분이 지나자
뭔가 달라지기 시작한다

497
00:24:27,458 --> 00:24:29,333
천천히, 마법처럼
하지만 명확하게

498
00:24:29,416 --> 00:24:33,125
검은 점은 스페이드가 되고
꼬불거리는 선은 5가 된다

499
00:24:33,208 --> 00:24:34,708
스페이드 5

500
00:24:34,791 --> 00:24:38,000
헨리는 떨리는 손으로
카드를 집어 뒤집는다

501
00:24:39,041 --> 00:24:40,250
'해냈어' 헨리가 말한다

502
00:24:41,333 --> 00:24:42,541
광분하는 헨리

503
00:24:42,625 --> 00:24:44,791
식음료 사러 갈 때 외엔
집에서 나가지 않는다

504
00:24:45,375 --> 00:24:47,250
온종일, 때론 밤 늦게까지

505
00:24:47,333 --> 00:24:49,583
스톱워치를 들고
카드를 들여다보며

506
00:24:49,666 --> 00:24:51,833
1초씩, 1초씩 기록을 단축한다

507
00:24:51,916 --> 00:24:54,791
한 달 후엔 1분 30초
6개월 후엔 20초

508
00:24:54,875 --> 00:24:56,708
다시 7개월 후엔 10초

509
00:24:56,791 --> 00:24:58,000
목표는 5초다

510
00:24:58,083 --> 00:25:00,708
최대 5초 안에
카드를 읽지 못하면

511
00:25:00,791 --> 00:25:02,875
카지노에서 이 방법은
쓸 수 없을 테니까

512
00:25:02,958 --> 00:25:06,083
목표에 가까워질수록
달성하기는 더 어려워진다

513
00:25:07,000 --> 00:25:09,166
10초에서 9초가 되는 데에
4주가 걸리고

514
00:25:09,250 --> 00:25:11,083
9초에서 8초가 되는 데에
5주가 걸린다

515
00:25:11,166 --> 00:25:15,375
이제 강도 높은 훈련도
12시간 연속 연습도 힘들지 않다

516
00:25:15,458 --> 00:25:17,791
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있으니까

517
00:25:17,875 --> 00:25:20,333
마지막 2초가 가장 힘들다
11개월이 걸린다

518
00:25:20,416 --> 00:25:22,041
어느 토요일의 늦은 오후

519
00:25:29,708 --> 00:25:33,583
5초, 헨리는 나머지 카드 모두
시간을 재가며 읽는다

520
00:25:33,666 --> 00:25:37,458
5초

521
00:25:38,500 --> 00:25:40,833
이 순간을 맞이하기까지
걸린 시간은?

522
00:25:41,666 --> 00:25:43,708
3년 3개월간의 부단한 노력

523
00:25:46,208 --> 00:25:48,625
런던에는 합법적 카지노가
100군데 넘게 있었다

524
00:25:48,708 --> 00:25:52,750
헨리는 그중 10군데의 회원이었고
로드하우스를 가장 좋아했다

525
00:25:52,833 --> 00:25:56,041
웅장한 조지아풍 건축물에 자리한
런던 최고의 카지노였다

526
00:25:56,125 --> 00:25:57,166
안녕하십니까, 슈거 씨

527
00:25:57,250 --> 00:25:59,916
얼굴을 기억하는 게
직업인 남자가 말했다

528
00:26:00,000 --> 00:26:03,125
근사한 계단을 올라
칩 교환소로 향했다

529
00:26:03,208 --> 00:26:05,250
1만 파운드짜리 수표를 썼다

530
00:26:05,333 --> 00:26:07,250
룰렛 판 주위에 모인 여자들은

531
00:26:07,333 --> 00:26:09,416
모이통에 모여든
토실한 암탉 떼 같았고

532
00:26:09,500 --> 00:26:12,458
불콰한 얼굴에 시가를 물고
칩을 세는 남자들은

533
00:26:12,541 --> 00:26:14,125
탐욕 가득한 눈빛이었다

534
00:26:15,541 --> 00:26:17,541
기이하게도
헨리는 생전 처음으로

535
00:26:17,625 --> 00:26:20,583
지긋지긋한 부자들을
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

536
00:26:20,666 --> 00:26:22,291
헨리는 블랙잭 테이블 중

537
00:26:22,375 --> 00:26:25,166
딜러의 오른쪽 자리가
비어 있는 곳을 찾았다

538
00:26:25,250 --> 00:26:28,250
딜러는 헨리의 플라크를
빈 슬롯에 꽂아 넣었다

539
00:26:28,333 --> 00:26:31,458
젊은-듯도 한 딜러는
검은 눈에 잿빛 피부의 남자로

540
00:26:31,541 --> 00:26:33,791
절대 웃지 않았으며
필요한 말만 했는데

541
00:26:33,875 --> 00:26:36,583
아주 가느다란 손가락에
계산기라도 달린 듯했다

542
00:26:36,666 --> 00:26:39,875
25파운드짜리 칩
여러 개를 집어 쌓아놓았는데

543
00:26:39,958 --> 00:26:42,708
셀 필요도 없었다
그의 손가락은 늘 정확하니까

544
00:26:42,791 --> 00:26:44,250
칩을 헨리 앞으로 밀어놓았다

545
00:26:44,333 --> 00:26:45,708
헨리는 칩을 정리하며

546
00:26:45,791 --> 00:26:47,875
딜러의 슈 속
제일 위 카드를 보았다

547
00:26:47,958 --> 00:26:51,375
5초 안에 10이라는 걸 알고
칩 8개, 2백 파운드를 밀어놓았다

548
00:26:51,458 --> 00:26:53,583
로드하우스에서 허용되는
최대 베팅이었다

549
00:26:53,666 --> 00:26:56,083
10 카드를 받았고
두 번째는 9였다

550
00:26:56,166 --> 00:26:57,333
합이 19

551
00:26:57,416 --> 00:26:58,416
그럴 땐 카드를 그만 받고

552
00:26:58,500 --> 00:27:02,083
딜러의 패가 20이나 21이
아니길 바라는 게 정석이다

553
00:27:02,166 --> 00:27:04,708
- 딜러가 헨리를 향해…
- 19입니다

554
00:27:04,791 --> 00:27:07,333
그리고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
'잠깐만요' 헨리가 말했다

555
00:27:07,416 --> 00:27:08,958
딜러가 다시 헨리 쪽을 보았다

556
00:27:09,041 --> 00:27:11,333
차가운 눈빛에
눈썹을 치켜올린 채였다

557
00:27:11,416 --> 00:27:13,583
- 19인데 더 받으시겠습니까?
- 건조한 어조로 물었다

558
00:27:13,666 --> 00:27:17,208
패를 망치지 않을 카드는
에이스와 2, 둘뿐이고

559
00:27:17,291 --> 00:27:21,250
2백 파운드나 베팅하고
카드를 더 받을 바보는 없다

560
00:27:21,333 --> 00:27:24,375
딜러가 건드리지도 않은
다음 카드의 뒷면이 보였다

561
00:27:24,458 --> 00:27:27,833
'네, 한 장 더요' 헨리가 말했다
어깨를 으쓱하고 카드를 주는 딜러

562
00:27:27,916 --> 00:27:31,083
헨리 앞의 10과 9 카드 옆에
클로버 2 카드가 놓였다

563
00:27:31,166 --> 00:27:32,708
- 21입니다
- 딜러가 침착하게 말했다

564
00:27:32,791 --> 00:27:35,750
그의 검은 눈동자가
헨리의 얼굴에 머물렀다

565
00:27:35,833 --> 00:27:37,500
조용히 경계하는 당황한 눈빛

566
00:27:38,666 --> 00:27:40,083
헨리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다

567
00:27:40,166 --> 00:27:42,208
19에서 카드를 받는 일은 없는데

568
00:27:42,291 --> 00:27:46,333
침착하게, 확신에 차서
카드를 받은 데다 따버렸으니까

569
00:27:47,083 --> 00:27:50,166
딜러의 눈빛을 본 헨리는
실수했음을 직감했다

570
00:27:50,250 --> 00:27:52,500
관심을 끌어버린 것이다
'실례합니다'

571
00:27:52,583 --> 00:27:54,000
다시는 그래선 안 된다

572
00:27:54,083 --> 00:27:57,125
매우 조심해야 하고
가끔씩 잃기도 해야 했다

573
00:27:57,208 --> 00:27:58,250
게임은 계속됐다

574
00:27:58,333 --> 00:28:00,041
너무나도 유리한 상황인지라

575
00:28:00,125 --> 00:28:02,583
적당히 따는 것도
쉬운 일이 아니었다

576
00:28:02,666 --> 00:28:05,416
1시간 동안 3만 파운드를 땄고
거기서 멈췄다

577
00:28:05,500 --> 00:28:07,208
백만 파운드도
딸 수 있었을 것이다

578
00:28:08,000 --> 00:28:09,208
고마워요

579
00:28:09,291 --> 00:28:11,958
이제 헨리는
세상 누구보다도 빠르게

580
00:28:12,041 --> 00:28:14,291
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

581
00:28:16,666 --> 00:28:17,500
흥미로운 일이다

582
00:28:22,041 --> 00:28:24,333
이게 실화가 아니라
허구의 이야기였다면

583
00:28:24,416 --> 00:28:28,583
놀랍고도 흥미진진한 엔딩을
만들어 내야 했을 것이다

584
00:28:28,666 --> 00:28:30,250
드라마틱하고 독특한 엔딩을

585
00:28:30,333 --> 00:28:33,416
예를 들면
헨리가 집에 가서 돈을 세는데

586
00:28:33,500 --> 00:28:36,333
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고

587
00:28:36,416 --> 00:28:37,875
가슴에 통증이 느껴진다

588
00:28:38,875 --> 00:28:41,333
당장 쉬기로 마음먹고
옷을 벗은 다음

589
00:28:41,416 --> 00:28:43,250
알몸으로 잠옷을 입으러 가는데

590
00:28:43,333 --> 00:28:46,458
벽에 걸린 전신 거울 앞을
지나다가 멈춰 선다

591
00:28:46,541 --> 00:28:49,541
그리고 습관적으로
집중하기 시작한다

592
00:28:49,625 --> 00:28:51,833
문득 몸속이 꿰뚫어 보인다

593
00:28:51,916 --> 00:28:54,250
엑스레이보다 더 명확해서
모든 게 다 보인다

594
00:28:54,333 --> 00:28:56,666
동맥, 정맥, 혈관을 흐르는 피

595
00:28:56,750 --> 00:28:59,541
간, 신장, 소장, 펄떡거리는 심장

596
00:28:59,625 --> 00:29:01,708
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보니

597
00:29:01,791 --> 00:29:05,958
우측 심장으로 들어가는 대정맥에
작은 검은 덩어리가 있다

598
00:29:06,041 --> 00:29:08,916
혈전이다
처음엔 멈춰 있는 듯하다

599
00:29:09,000 --> 00:29:12,083
그러다 움직인다
1mm쯤, 살짝 이동한다

600
00:29:12,166 --> 00:29:16,083
혈액이 혈전을 지나 올라가자
혈전이 다시 움직인다

601
00:29:16,166 --> 00:29:19,166
1cm 넘게 전진하는데
헨리는 두려움 속에 지켜본다

602
00:29:19,250 --> 00:29:22,166
정맥을 따라 움직이는
커다란 혈전은

603
00:29:22,250 --> 00:29:23,666
결국 심장으로 들어갈 테니까

604
00:29:24,208 --> 00:29:25,500
곧 죽는 것이다

605
00:29:25,583 --> 00:29:29,416
허구의 엔딩으로는 괜찮지만
이건 허구가 아니라 팩트다

606
00:29:29,500 --> 00:29:32,333
사실이 아닌 것은
헨리 슈거라는 이름뿐이다

607
00:29:32,416 --> 00:29:35,750
본명은 알릴 수 없고
알려서도 안 된다

608
00:29:35,833 --> 00:29:37,875
그 외엔 모두 실화이며

609
00:29:37,958 --> 00:29:41,000
그러므로 진짜 엔딩이 존재한다

610
00:29:41,083 --> 00:29:42,583
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

611
00:29:46,916 --> 00:29:48,208
헨리는 1시간 동안 걸었다

612
00:29:48,291 --> 00:29:51,583
선선하고 쾌적한 저녁
도시의 활기는 여전했다

613
00:29:51,666 --> 00:29:55,041
재킷 안주머니에 든
두툼한 돈다발을 느끼고는

614
00:29:55,125 --> 00:29:56,500
톡톡 두드렸다

615
00:29:56,583 --> 00:29:58,708
1시간이나 들고 다니기엔
큰돈이지만

616
00:29:58,791 --> 00:30:00,791
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

617
00:30:00,875 --> 00:30:04,583
이런 대성공을 거뒀는데도
별로 신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

618
00:30:04,666 --> 00:30:07,333
수행하기 전인 3년 전에
이런 일이 생겼다면

619
00:30:07,416 --> 00:30:09,041
극도로 흥분해서는

620
00:30:09,125 --> 00:30:11,666
가까운 나이트클럽으로 달려가
축배를 들었겠지만

621
00:30:11,750 --> 00:30:13,750
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

622
00:30:13,833 --> 00:30:15,083
오히려 슬펐다

623
00:30:15,166 --> 00:30:17,916
베팅만 하면 딸 게 확실하니

624
00:30:18,000 --> 00:30:20,541
스릴도, 서스펜스도
위험부담도 없는 것이다

625
00:30:21,166 --> 00:30:24,083
이제 전 세계를 여행하며
엄청난 돈을 벌 수 있지만

626
00:30:24,166 --> 00:30:25,750
그게 재미가 있을까?

627
00:30:25,833 --> 00:30:28,000
또 한 가지
이런 가능성은 없을까?

628
00:30:28,083 --> 00:30:30,166
수련을 통해 능력을 얻는 과정에서

629
00:30:30,250 --> 00:30:33,833
헨리의 인생관이
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

630
00:30:33,916 --> 00:30:35,041
가능한 일이었다

631
00:30:35,750 --> 00:30:38,458
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
일어난 헨리의 눈에

632
00:30:38,541 --> 00:30:41,916
화장대에 놓인
엄청난 돈다발이 들어왔는데

633
00:30:42,541 --> 00:30:43,416
갖고 싶지가 않았다

634
00:31:07,500 --> 00:31:08,333
뭡니까?

635
00:31:08,416 --> 00:31:11,875
안녕하십니까
선생한테 드리는 선물입니다

636
00:31:11,958 --> 00:31:12,791
어…

637
00:31:14,000 --> 00:31:14,833
뭐요?

638
00:31:15,625 --> 00:31:16,958
주머니에 넣으세요!

639
00:31:18,458 --> 00:31:19,291
그럽시다

640
00:31:28,208 --> 00:31:29,250
뭐지?

641
00:31:29,333 --> 00:31:30,166
돈이야

642
00:31:30,250 --> 00:31:31,083
가져요!

643
00:31:37,583 --> 00:31:38,416
이봐요!

644
00:31:41,875 --> 00:31:42,708
저것 봐

645
00:32:17,541 --> 00:32:18,708
초인종이 울렸다

646
00:32:18,791 --> 00:32:20,541
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?

647
00:32:20,625 --> 00:32:23,208
안녕하십니까, 죄송합니다
돈을 나눠주고 있었거든요

648
00:32:23,291 --> 00:32:25,750
- 폭동을 일으킨 거요!
- 돈을 나눠준 건데요

649
00:32:25,833 --> 00:32:28,000
다신 안 그러겠습니다
곧 다들 흩어질 거예요

650
00:32:28,083 --> 00:32:31,000
경관은 뒷짐 졌던 손을 풀어
50파운드 지폐를 내밀었다

651
00:32:31,083 --> 00:32:34,333
- 하나 챙기셨군요
- 증거물입니다, 돈의 출처는요?

652
00:32:34,416 --> 00:32:37,166
블랙잭에서 땄습니다
어제 운이 무척 좋았거든요

653
00:32:37,250 --> 00:32:39,875
헨리가 카지노 이름을 말하자
경관은 수첩에 받아적었다

654
00:32:39,958 --> 00:32:41,333
아마 확인해 줄 겁니다

655
00:32:41,416 --> 00:32:42,583
경관은 수첩을 내렸다

656
00:32:42,666 --> 00:32:43,666
- 상관없습니다
- 그런가요?

657
00:32:43,750 --> 00:32:46,583
전혀요
선생 이야기를 믿습니다만

658
00:32:46,666 --> 00:32:49,541
그렇다고 좀 전 행동의
변명은 되지 않습니다

659
00:32:49,625 --> 00:32:51,958
불법적인 일은 안 했는데요

660
00:32:52,791 --> 00:32:53,708
불법이요?

661
00:32:54,458 --> 00:32:55,583
어리석은 사람!

662
00:32:56,333 --> 00:32:59,708
운이 좋아서 그렇게 큰돈을 땄는데

663
00:32:59,791 --> 00:33:02,750
마구 나눠주고 싶다면
창밖으로 던질 게 아니라

664
00:33:02,833 --> 00:33:04,791
좋은 곳에 썼어야지요

665
00:33:04,875 --> 00:33:06,958
병원이나 고아원 같은 곳에요

666
00:33:07,041 --> 00:33:09,125
전국의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들은

667
00:33:09,208 --> 00:33:12,375
돈이 없어서 아이들
크리스마스 선물도 못 사주는데

668
00:33:12,458 --> 00:33:14,208
어려움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

669
00:33:14,291 --> 00:33:16,666
세상 물정 모르는
웬 부잣집 아들이

670
00:33:16,750 --> 00:33:19,666
길바닥에 돈을 마구 뿌리다니요!

671
00:33:19,750 --> 00:33:22,666
경관은 그 말을 남기고
쿵쾅대며 계단을 내려갔다

672
00:33:22,750 --> 00:33:23,666
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

673
00:33:23,750 --> 00:33:27,750
분노에 차 뱉어낸 경관의 말이
마음 깊이 꽂혀버린 것이다

674
00:33:27,833 --> 00:33:28,708
부끄러웠다

675
00:33:29,458 --> 00:33:30,708
끔찍한 기분이었다

676
00:33:36,916 --> 00:33:38,000
그리고 갑자기

677
00:33:38,083 --> 00:33:41,500
강력한 전기가 온몸을
훑고 지나는 느낌이 들더니

678
00:33:41,583 --> 00:33:45,208
모든 걸 바꿔놓을 훌륭하고도
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

679
00:33:45,291 --> 00:33:46,791
헨리는 방을 왔다 갔다 하며

680
00:33:46,875 --> 00:33:49,916
그 아이디어를 실현시킬
방법들을 생각했다

681
00:33:50,000 --> 00:33:54,708
첫째, 나는 앞으로 평생 매일
엄청난 돈을 딸 것이다

682
00:33:55,500 --> 00:33:59,250
둘째, 같은 카지노 방문은
6개월에 한 번으로 제한한다

683
00:33:59,333 --> 00:34:02,000
셋째, 한 자리에서
너무 많이 따면 안 된다

684
00:34:02,083 --> 00:34:04,333
하룻밤에 5만 파운드를
최대로 한다

685
00:34:04,416 --> 00:34:08,166
넷째, 하루 5만 파운드씩
1년 365일이면

686
00:34:08,250 --> 00:34:10,916
1,825만 파운드다

687
00:34:11,000 --> 00:34:12,166
다섯째, 계속 이동한다

688
00:34:12,250 --> 00:34:14,791
한 도시에서
3일 넘게 머무르지 않는다

689
00:34:14,875 --> 00:34:16,958
런던, 몬테카를로, 칸, 비아리츠

690
00:34:17,041 --> 00:34:20,083
도빌, 라스베이거스, 멕시코시티
부에노스아이레스, 나소

691
00:34:20,166 --> 00:34:24,416
여섯째, 번 돈으로 전 세계에
병원과 고아원을 짓는다

692
00:34:24,500 --> 00:34:26,791
맞아, 그냥 꿈이라면
진부한 감상이겠지만

693
00:34:26,875 --> 00:34:29,083
난 분명히 이 일을 해낼 수 있어

694
00:34:29,166 --> 00:34:33,208
진부하기는커녕
정말이지 근사할 거라고

695
00:34:33,291 --> 00:34:34,791
일곱째, 파트너가 필요하다

696
00:34:34,875 --> 00:34:38,541
책상머리에 앉아 돈을 받아서
필요한 곳에 보낼 사람

697
00:34:38,625 --> 00:34:41,791
내가 언제까지나 진정으로
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

698
00:34:41,875 --> 00:34:45,041
존 윈스턴은 헨리의 부친과
헨리의 회계사였고

699
00:34:45,125 --> 00:34:47,708
존 윈스턴의 부친은
헨리의 부친의 부친의 회계사였다

700
00:34:47,791 --> 00:34:49,708
세계 최고의 부자가
될 수 있습니다

701
00:34:51,833 --> 00:34:54,000
세계 최고의 부자는
되고 싶지 않은데

702
00:34:56,583 --> 00:34:59,250
잉글랜드에선 못 합니다
세금으로 다 뺏길 거예요

703
00:34:59,333 --> 00:35:01,416
스위스로 가야 하는데
당장은 안 됩니다

704
00:35:01,500 --> 00:35:04,125
슈거 씨처럼 부양가족 없는
혼자 몸이 아니니까요

705
00:35:04,208 --> 00:35:07,000
가족과도 얘기하고
동업자들에게도 알리고

706
00:35:07,083 --> 00:35:09,541
여기 집을 팔고
스위스에 집을 마련해야 하고

707
00:35:09,625 --> 00:35:11,916
애들 전학 문제도 있고
시간이 걸립니다

708
00:35:12,000 --> 00:35:15,125
1년 후, 헨리가 로잔에 있는
윈스턴에게 보낸 돈은

709
00:35:15,208 --> 00:35:17,000
총 1억 2천만 파운드였다

710
00:35:17,083 --> 00:35:18,708
헨리는 일주일에 5일

711
00:35:18,791 --> 00:35:21,541
윈스턴 슈거 LLC라는
스위스 소재 회사로 송금했다

712
00:35:21,625 --> 00:35:25,708
돈의 출처와 사용처를 아는 건
존과 헨리뿐이었다

713
00:35:25,791 --> 00:35:27,458
월요일 송금액이 가장 컸는데

714
00:35:27,541 --> 00:35:30,125
은행이 문을 닫는
금, 토, 일요일 분량을

715
00:35:30,208 --> 00:35:31,333
한꺼번에 보냈기 때문이다

716
00:35:31,416 --> 00:35:33,041
헨리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

717
00:35:33,125 --> 00:35:35,750
한 주에 여러 차례
신원을 바꿀 때도 있었다

718
00:35:35,833 --> 00:35:38,416
존은 헨리가 돈을 보내는
은행의 주소를 보고

719
00:35:38,500 --> 00:35:40,833
헨리의 거취를 짐작할 뿐이었다

720
00:35:40,916 --> 00:35:42,250
그야말로 근사한 일이었다

721
00:36:02,541 --> 00:36:05,958
헨리는 63세이던 작년에
폐색전으로 사망했다

722
00:36:06,041 --> 00:36:09,166
다가오는 죽음을 직접 봤지만
마음은 매우 평화로웠다

723
00:36:09,250 --> 00:36:11,833
계획대로 움직인 지
20년이 조금 넘은 시기였고

724
00:36:11,916 --> 00:36:14,458
총 6억 4천4백만 파운드를 벌었다

725
00:36:14,541 --> 00:36:15,500
또한 전 세계에

726
00:36:15,583 --> 00:36:19,208
21개의 훌륭한 어린이 병원과
고아원을 지어 훌륭히 운영했는데

727
00:36:19,291 --> 00:36:23,333
행정 및 재정 관리는 로잔에 있는
존 윈스턴과 직원들이 담당했다

728
00:36:23,416 --> 00:36:24,666
임무를 완수한 것이다

729
00:36:29,125 --> 00:36:31,375
그럼 나는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?

730
00:36:31,458 --> 00:36:33,208
좋은 질문이다, 대답하겠다

731
00:36:33,291 --> 00:36:36,791
헨리가 죽고 얼마 안 있어
스위스의 존이 전화를 걸어 왔다

732
00:36:36,875 --> 00:36:38,291
자신을 간단히 소개했는데

733
00:36:38,375 --> 00:36:41,750
윈스턴 슈거 LLC라는
회사의 대표라고 했다

734
00:36:41,833 --> 00:36:44,000
나더러 로잔으로 와서
자길 만나고

735
00:36:44,083 --> 00:36:47,000
회사의 간략한 역사를
글로 써보겠냐고 했다

736
00:36:47,625 --> 00:36:49,250
날 선택한 경위는 알 수 없다

737
00:36:49,333 --> 00:36:52,125
작가 명단을 앞에 놓고
아무 데나 찍은 걸지도

738
00:36:52,208 --> 00:36:54,375
원고료는 후하게 쳐주겠다며
덧붙였다

739
00:36:54,458 --> 00:36:56,583
'얼마 전에 대단한 인물이
사망했습니다'

740
00:36:56,666 --> 00:36:58,291
'헨리 슈거라는 분이지요'

741
00:36:58,375 --> 00:37:02,125
'그분이 세상을 위해 한 일을
조금은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'

742
00:37:02,208 --> 00:37:03,916
아무것도 몰랐던 나는

743
00:37:04,000 --> 00:37:07,541
글로 적어 출판할 정도로
흥미로운 이야기냐고 물었는데

744
00:37:07,625 --> 00:37:11,041
존 윈스턴은 빈정이 상했다
모욕으로 받아들인 듯도 했다

745
00:37:11,625 --> 00:37:13,083
5분간 통화하며

746
00:37:13,166 --> 00:37:16,041
헨리 슈거의 비밀스러운
행적에 대해 들었다

747
00:37:16,125 --> 00:37:17,541
이젠 비밀이 아니었다

748
00:37:17,625 --> 00:37:21,083
헨리는 죽었고
카지노에 갈 일은 없으니까

749
00:37:21,166 --> 00:37:23,083
'가지요' 내가 말했다

750
00:37:23,166 --> 00:37:26,000
나는 로잔에서 일흔이 넘은
존 윈스턴을 만났다

751
00:37:26,083 --> 00:37:27,291
동석한 맥스 잉글먼은

752
00:37:27,375 --> 00:37:30,583
저명한 메이크업 전문가로서
헨리와 전 세계를 다니며

753
00:37:30,666 --> 00:37:33,166
훌륭한 분장 솜씨로
신원을 감춰줬다

754
00:37:33,250 --> 00:37:37,333
둘 다 헨리의 죽음에 무너졌는데
맥스는 존 윈스턴보다 더 심했다

755
00:37:37,416 --> 00:37:39,625
그를 사랑했습니다
위대한 사람이었어요

756
00:37:39,708 --> 00:37:42,666
존 윈스턴은 짙은 푸른색
연습장을 실제로 보여줬다

757
00:37:42,750 --> 00:37:45,666
Z.Z. 차터지가 1935년에
캘커타에서 기록한 내용이었다

758
00:37:45,750 --> 00:37:47,833
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필사했다

759
00:37:47,916 --> 00:37:49,375
'하나만 더 묻죠' 내가 말했다

760
00:37:49,458 --> 00:37:53,083
'계속 헨리 슈거라 칭하면서
진짜 이름이 아니라고 하시는데'

761
00:37:53,166 --> 00:37:56,375
'이야기를 통해 그분의 신원을
밝히지 않기를 원하시나요?'

762
00:37:56,458 --> 00:37:57,750
- 그래요
- 존 윈스턴이 대답했다

763
00:37:57,833 --> 00:38:00,208
그분 신원을 밝히지 않기로
맥스와 약속했습니다

764
00:38:00,291 --> 00:38:02,750
아마 조만간에 알려지긴 하겠죠

765
00:38:02,833 --> 00:38:04,833
영국의 유명한 가문 출신이니까요

766
00:38:04,916 --> 00:38:07,500
그래도 알아내려 하지는
않으셨으면 합니다

767
00:38:07,583 --> 00:38:09,791
부탁이니 헨리 슈거 씨라고
칭해주세요

768
00:38:11,833 --> 00:38:13,291
난 그 말대로 했다

769
00:38:20,791 --> 00:38:24,583
"로알드 달은
'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'를"

770
00:38:24,666 --> 00:38:28,375
"버킹엄셔 그레이트 미센든의
작업실 '집시 하우스'에서"

771
00:38:28,458 --> 00:38:31,416
"1976년 2월부터
12월에 걸쳐 집필했다"

772
00:38:37,458 --> 00:38:40,583
"백조"

773
00:38:40,666 --> 00:38:42,166
"오솔길"

774
00:38:42,250 --> 00:38:44,583
어니는 생일 선물로
라이플총을 받았다

775
00:38:45,166 --> 00:38:48,291
총과 총알 한 상자를 들고
뭘 죽여볼까, 하며 나섰다

776
00:38:48,833 --> 00:38:50,041
레이먼드의 집 앞에서

777
00:38:50,125 --> 00:38:53,458
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
길게 휘파람을 불었다

778
00:38:54,250 --> 00:38:57,125
레이먼드는 어니의 단짝으로
네 집 건너에 살았다

779
00:38:57,208 --> 00:38:59,250
어니가 총을
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

780
00:38:59,333 --> 00:39:01,833
'죽이네!' 레이먼드가 말했다
'갖고 놀면 재밌겠는걸!'

781
00:39:03,125 --> 00:39:06,375
두 소년은 길을 나섰다
5월의 어느 토요일 아침이었다

782
00:39:06,458 --> 00:39:08,416
밤나무엔 꽃이 만발했고

783
00:39:08,500 --> 00:39:10,958
하얀 산사나무 꽃은
산울타리를 따라 피어 있었다

784
00:39:11,041 --> 00:39:13,875
어니와 레이먼드는
좁은 길을 따라 걸으며

785
00:39:13,958 --> 00:39:15,958
보이는 새마다 쏴댔다

786
00:39:16,041 --> 00:39:18,875
피리새, 바위종다리
딱새, 노랑턱멧새

787
00:39:18,958 --> 00:39:20,625
철로에 도달할 때쯤엔

788
00:39:20,708 --> 00:39:23,583
작은 새 14마리가
줄에 매달려 있었다

789
00:39:24,416 --> 00:39:27,583
'저기!' 어니가 팔을 쭉 뻗어
가리키며 속삭였다, '저기 봐!'

790
00:39:27,666 --> 00:39:29,500
덤불 너머에서 작은 소년 하나가

791
00:39:29,583 --> 00:39:32,166
망원경으로
어느 고목을 보고 있었다

792
00:39:32,250 --> 00:39:33,833
'멍청한 왓슨 자식이야!'

793
00:39:35,333 --> 00:39:37,208
작고 연약한 피터 왓슨은

794
00:39:37,291 --> 00:39:40,250
얼굴엔 주근깨가 가득하고
알이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

795
00:39:40,333 --> 00:39:41,583
워낙 머리가 비상해서

796
00:39:41,666 --> 00:39:44,458
13살밖에 안 됐는데도
상급반에 다니고 있었다

797
00:39:44,541 --> 00:39:47,291
음악을 좋아했고
피아노도 잘 쳤으며

798
00:39:47,375 --> 00:39:49,875
게임은 잘 못 했지만
조용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

799
00:39:51,791 --> 00:39:55,041
덩치 큰 소년 둘이
작은 소년 쪽으로 다가갔다

800
00:39:57,041 --> 00:39:59,541
망원경을 눈에 댄 채
집중하고 있어서

801
00:39:59,625 --> 00:40:01,875
두 소년이 다가오는 건
보지 못했다

802
00:40:03,208 --> 00:40:05,583
'손 들어!'
어니가 총을 겨누며 소리쳤다

803
00:40:05,666 --> 00:40:07,250
피터 왓슨은 깜짝 놀랐다

804
00:40:09,250 --> 00:40:11,916
망원경 너머로
두 방해꾼을 바라보았다

805
00:40:12,000 --> 00:40:14,250
'야!' 어니가 소리쳤다
'손 들라니까!'

806
00:40:14,333 --> 00:40:15,666
피터 왓슨은 미동도 않고

807
00:40:15,750 --> 00:40:18,458
두 손으로 망원경을
꼭 쥐고 서 있었다

808
00:40:18,541 --> 00:40:20,291
레이먼드와 어니를 번갈아 보았다

809
00:40:20,375 --> 00:40:23,875
겁나진 않지만 저 두 바보에게
맞춰주는 게 낫다는 걸 잘 알았다

810
00:40:23,958 --> 00:40:26,500
몇 년 동안 그 둘의 관심을
듬뿍 받았으니까

811
00:40:26,583 --> 00:40:27,625
손 들어

812
00:40:27,708 --> 00:40:29,583
가장 현명한 대처였다

813
00:40:29,666 --> 00:40:32,500
레이먼드가 다가가
망원경을 채 갔다

814
00:40:32,583 --> 00:40:34,416
'누굴 훔쳐보는 거야?'
레이먼드가 쏘아붙였다

815
00:40:34,500 --> 00:40:36,708
피터 왓슨은 상황을 계산해 보았다

816
00:40:36,791 --> 00:40:39,500
냅다 도망쳐 봤자
금방 잡힐 것이고

817
00:40:39,583 --> 00:40:42,083
도와달라고 소릴 쳐봤자
아무도 못 들을 것이다

818
00:40:42,166 --> 00:40:46,708
남은 방법은 침착하게
말로 풀어보는 것뿐이었다

819
00:40:46,791 --> 00:40:49,041
'청딱따구리를 보고 있었어'
피터가 말했다

820
00:40:49,125 --> 00:40:49,958
'뭐라고?'

821
00:40:50,041 --> 00:40:52,666
'수컷 청딱따구리'
학명은 피쿠스 비리디스다

822
00:40:52,750 --> 00:40:55,750
'죽은 나무 둥치를 쪼면서
유충을 찾고 있더라고'

823
00:40:55,833 --> 00:40:57,833
'어디 있는데?'
어니가 총을 들며 물었다

824
00:40:57,916 --> 00:41:00,125
'내가 잡을 거야!'
'못 잡아' 피터가 말하며

825
00:41:00,208 --> 00:41:03,208
레이먼드의 어깨 위
줄에 꿰인 새들을 보았다

826
00:41:03,291 --> 00:41:06,750
'형들이 소리 질러서 날아갔어
딱따구리는 겁이 많거든'

827
00:41:12,583 --> 00:41:14,416
레이먼드가 어니에게
뭐라고 속닥대니

828
00:41:14,500 --> 00:41:16,875
어니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
'좋은 생각이야!'

829
00:41:16,958 --> 00:41:19,666
어니는 총을 내려놓고
작은 아이에게 다가가서는

830
00:41:19,750 --> 00:41:21,125
바닥에 쓰러뜨렸고

831
00:41:21,208 --> 00:41:24,000
레이먼드는 주머니에서
끈을 꺼내 길게 잘랐다

832
00:41:24,083 --> 00:41:26,208
둘은 피터의 손목을 꽁꽁 묶었다

833
00:41:26,291 --> 00:41:27,791
'다리도' 레이먼드가 말했다

834
00:41:27,875 --> 00:41:30,541
발버둥 치다가
배를 한 대 얻어맞은 피터는

835
00:41:30,625 --> 00:41:32,333
숨이 안 쉬어져서
그대로 누워 있었다

836
00:41:32,416 --> 00:41:36,375
두 소년은 요리할 닭을 준비하듯
피터의 발목까지 묶어버렸다

837
00:41:36,458 --> 00:41:37,916
어니는 총을 집어 들었고

838
00:41:38,000 --> 00:41:41,166
둘은 작은 소년을 들고
철로를 향해 갔다

839
00:41:41,250 --> 00:41:43,208
피터 왓슨은 한마디도 안 했다

840
00:41:43,291 --> 00:41:46,083
뭘 어쩌려는지 몰라도
말로는 해결 안 될 테니까

841
00:41:46,166 --> 00:41:49,958
둘은 철로 앞까지 아이를 끌고 가
철로 중간에 눕혔다

842
00:41:50,041 --> 00:41:51,166
바로 이 철로였다

843
00:41:53,166 --> 00:41:56,000
바로 이 철로에서
27년 전 내가 당한 일이다

844
00:41:56,083 --> 00:41:57,375
내 이름은 피터 왓슨이다

845
00:41:58,958 --> 00:42:00,541
'끈 더 줘' 어니가 말했다

846
00:42:04,625 --> 00:42:08,458
그 둘이 작업을 마쳤을 땐
피터는 철로에 꽁꽁 묶여 있었다

847
00:42:08,541 --> 00:42:11,208
머리와 발만 겨우 움직였다

848
00:42:11,291 --> 00:42:14,125
어니와 레이먼드는
물러나서 작품을 감상했다

849
00:42:14,208 --> 00:42:16,125
'아주 깔끔한데?' 어니가 말했다

850
00:42:16,208 --> 00:42:19,083
'이건 살인이야'
철로에 누운 소년이 말했다

851
00:42:19,166 --> 00:42:21,083
'꼭 그런 건 아니지'
어니가 말했다

852
00:42:21,166 --> 00:42:23,125
'기차 밑에
공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'

853
00:42:23,208 --> 00:42:25,875
'바닥에 납작하게 붙으면
살 수 있을지 몰라'

854
00:42:27,333 --> 00:42:30,750
둘은 경사면을 올라가
덤불 뒤에 앉았다

855
00:42:30,833 --> 00:42:32,958
어니가 담뱃갑을 꺼냈고
둘은 담배를 피웠다

856
00:42:33,041 --> 00:42:35,250
풀어줄 생각이 없음을
피터는 알고 있었다

857
00:42:35,333 --> 00:42:37,250
위험한 망나니들인 것이다

858
00:42:37,333 --> 00:42:39,791
위험하고 멍청한 망나니들

859
00:42:39,875 --> 00:42:42,625
'침착하게 생각해 보자'
피터가 중얼거렸다

860
00:42:42,708 --> 00:42:44,833
그대로 누워 상황을 파악했다

861
00:42:44,916 --> 00:42:46,791
머리에서 제일 높은 부분은 코였다

862
00:42:46,875 --> 00:42:50,541
코끝은 철로보다
대략 10cm쯤 올라와 있었다

863
00:42:50,625 --> 00:42:53,166
너무 높은가?
현대식 디젤 기관차라 알 수 없다

864
00:42:53,250 --> 00:42:56,333
철로의 가로대 사이 자갈 위에
머리를 대고 있으니

865
00:42:56,416 --> 00:42:58,041
조금 더 파고들어야 했다

866
00:42:58,750 --> 00:43:01,541
머리를 좌우로 움직여
자갈을 옆으로 밀어내니

867
00:43:01,625 --> 00:43:04,375
머리 아래 자갈 층이
조금씩 파였다

868
00:43:04,458 --> 00:43:07,833
결국 머리는 5cm쯤 낮췄으니
괜찮을 것 같은데

869
00:43:07,916 --> 00:43:08,833
발은 어쩐다?

870
00:43:08,916 --> 00:43:11,791
발가락 끝을 안쪽으로 모아
납작하게 눕힌 다음

871
00:43:11,875 --> 00:43:13,583
기차를 기다렸다

872
00:43:13,666 --> 00:43:17,250
어쩌면 기차 아래쪽에
진공 현상이 생겨서

873
00:43:17,333 --> 00:43:20,375
자기 몸을 빨아들일 수도
있다는 생각이 들었다

874
00:43:20,458 --> 00:43:24,791
그렇다면 온 힘을 동원해서
몸을 땅에 최대한 붙여야만 했다

875
00:43:24,875 --> 00:43:28,666
'힘이 빠지면 안 돼
최대한 강하게 땅에 붙자'

876
00:43:28,750 --> 00:43:30,875
저 위의 하늘을 바라보니

877
00:43:30,958 --> 00:43:33,750
적운 하나가 오른쪽으로
천천히 떠 가고 있었다

878
00:43:33,833 --> 00:43:37,833
기체가 빨간색인 소형
하이윙 단엽기가 구름을 스쳐 갔다

879
00:43:37,916 --> 00:43:41,500
구식 파이퍼컵이네, 하며
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

880
00:43:42,083 --> 00:43:43,166
그런데 문득

881
00:43:43,250 --> 00:43:47,083
양쪽 레일에서 묘하게
웅웅대는 소리가 들렸다

882
00:43:47,166 --> 00:43:50,291
거의 안 들릴 만큼 작은
툭툭 치는 소리가

883
00:43:50,375 --> 00:43:52,916
먼 레일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

884
00:43:58,916 --> 00:44:00,500
피터는 고개를 들어

885
00:44:00,583 --> 00:44:03,916
저 멀리까지 이어진
철로를 바라보았고

886
00:44:04,000 --> 00:44:04,958
기차가 보였다

887
00:44:05,041 --> 00:44:07,916
처음엔 검은 점 같았는데
바라보던 몇 초 사이에

888
00:44:08,000 --> 00:44:10,750
점이 점점 커지면서
윤곽이 생기더니

889
00:44:10,833 --> 00:44:15,291
곧 점이 아니라 커다랗고 네모난
증기 기관차의 앞모습으로 변했다

890
00:44:15,375 --> 00:44:17,625
피터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
최대한 눌러서

891
00:44:17,708 --> 00:44:19,750
아까 파놓은 구덩이로 밀착시켰다

892
00:44:19,833 --> 00:44:21,291
발가락 끝을 모아 바닥에 붙이고

893
00:44:21,375 --> 00:44:24,333
눈을 꼭 감은 채
몸을 지면에 붙였다

894
00:44:24,416 --> 00:44:27,208
엄청난 굉음과 함께
기차가 들이닥쳤다

895
00:44:27,291 --> 00:44:28,916
머릿속에서 총이 발사된 듯했고

896
00:44:29,000 --> 00:44:31,625
엄청난 기세와 소리로
몰아치는 바람은

897
00:44:31,708 --> 00:44:35,041
허리케인처럼 콧구멍에서
허파까지 휘저어댔다

898
00:44:35,125 --> 00:44:37,833
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
숨 막히는 바람

899
00:44:37,916 --> 00:44:39,916
괴성을 지르는 식인 괴물이

900
00:44:40,000 --> 00:44:43,875
자신을 산 채로 입에 넣고
삼켜버린 것만 같았다

901
00:44:43,958 --> 00:44:46,083
그러다 모든 게 끝났다
기차가 지나간 것이다

902
00:44:46,791 --> 00:44:49,250
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니

903
00:44:49,333 --> 00:44:51,833
커다란 흰 구름은
여전히 흘러가고 있었다

904
00:44:51,916 --> 00:44:53,291
모두 끝났다

905
00:44:53,375 --> 00:44:54,375
견뎌낸 것이다

906
00:45:00,916 --> 00:45:02,583
- 풀어줘
- 어니가 말했다

907
00:45:02,666 --> 00:45:05,458
레이먼드는 피터를
철로에 묶었던 줄을 끊었다

908
00:45:05,541 --> 00:45:07,875
'발도 풀어줘, 손은 묶어두고'

909
00:45:07,958 --> 00:45:10,250
레이먼드는
발목을 묶은 줄을 끊었다

910
00:45:10,333 --> 00:45:13,375
'아직은 우리 포로야, 친구'
어니가 말했다

911
00:45:13,458 --> 00:45:17,416
덩치 큰 두 소년은 피터 왓슨을
데리고 호수로 향했다

912
00:45:17,500 --> 00:45:20,125
포로의 두 손은
앞으로 모아 묶인 채였다

913
00:45:20,208 --> 00:45:22,208
어니는 한쪽 손에 총을 들었고

914
00:45:22,291 --> 00:45:25,208
레이먼드는 피터에게 빼앗은
망원경을 들고 있었다

915
00:45:28,833 --> 00:45:30,250
길고 좁은 호숫가엔

916
00:45:30,333 --> 00:45:32,583
커다란 버드나무들이
늘어서 있었다

917
00:45:32,666 --> 00:45:34,458
호수 한가운데는 깨끗했지만

918
00:45:34,541 --> 00:45:37,000
물가 쪽엔 골풀이 한가득이었다

919
00:45:37,083 --> 00:45:39,750
'좋아' 어니가 말했다
'이렇게 하자'

920
00:45:39,833 --> 00:45:43,291
'넌 얘 팔을, 난 다리를 잡고
셋을 센 다음'

921
00:45:43,375 --> 00:45:45,791
'저 골풀 숲 너머로
있는 힘껏 던지는 거야'

922
00:45:45,875 --> 00:45:48,500
'저기 봐!' 레이먼드가 끼어들었다
'저기 저놈을 잡자!'

923
00:45:48,583 --> 00:45:50,541
피터 왓슨도
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

924
00:45:50,625 --> 00:45:54,250
갈대와 골풀을 수면 위로
60cm쯤 쌓아 올려 만든

925
00:45:54,333 --> 00:45:55,791
둥지 하나가 보였다

926
00:45:55,875 --> 00:45:57,791
그곳엔 근사한 백조 한 마리가

927
00:45:57,875 --> 00:46:00,041
호수의 여신처럼
평온히 앉아 있었다

928
00:46:00,125 --> 00:46:03,583
백조는 경계하듯 주의 깊게
물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

929
00:46:03,666 --> 00:46:06,041
'맙소사!' 레이먼드가 외쳤다
'너무 예쁘잖아!'

930
00:46:06,125 --> 00:46:09,583
어니는 포로의 팔을 놓고
총을 들어 겨누었다

931
00:46:09,666 --> 00:46:13,166
'여… 여긴 조류 보호구역이야'
피터가 더듬거리며 말했다

932
00:46:13,250 --> 00:46:15,083
'뭐라고?' 어니가 물었다

933
00:46:15,166 --> 00:46:18,333
피터는 저 안에서
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고

934
00:46:18,416 --> 00:46:20,125
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

935
00:46:20,208 --> 00:46:22,541
'백조는 잉글랜드 최고의
보호종 조류야'

936
00:46:22,625 --> 00:46:26,083
'둥지에 있을 땐 절대 쏘면 안 돼
새끼를 품고 있을지도 몰라'

937
00:46:26,166 --> 00:46:29,375
'그러지 마, 안 돼!
제발 그러지 마, 안 돼!'

938
00:46:30,958 --> 00:46:33,375
총알은 우아한 백조의 머리에
정통으로 맞았고

939
00:46:33,458 --> 00:46:36,375
길고 하얀 목이
둥지 옆으로 늘어졌다

940
00:46:46,666 --> 00:46:47,500
열어요

941
00:47:00,500 --> 00:47:02,875
'손 풀어줘, 레이먼드
사냥개 역할 시켜야지'

942
00:47:02,958 --> 00:47:05,833
레이먼드가 칼을 꺼내
소년의 손목을 묶은 줄을 끊었다

943
00:47:05,916 --> 00:47:07,000
'가져와'

944
00:47:07,083 --> 00:47:08,291
'싫어' 내가 말했다

945
00:47:09,125 --> 00:47:12,250
어니가 피터의 뺨을 세게 때렸고

946
00:47:12,333 --> 00:47:14,916
한쪽 콧구멍에서
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

947
00:47:15,000 --> 00:47:18,583
'한 번만 더 내 말 안 들으면
아주 본때를 보여주겠어!'

948
00:47:18,666 --> 00:47:23,208
'그 하얀 앞니를 위아래 몽땅
부러뜨릴 거야, 알겠냐?'

949
00:47:23,708 --> 00:47:24,666
피터는 대답하지 않았다

950
00:47:24,750 --> 00:47:26,958
'대답해!' 어니가 왈왈댔다
'알아들었냐고!'

951
00:47:27,041 --> 00:47:29,708
'응' 피터가 조용히 말했다
'알아들었어'

952
00:47:30,583 --> 00:47:34,833
피터 왓슨은 눈물을 흘리며
호숫가로 가서 물에 들어갔다

953
00:47:34,916 --> 00:47:38,500
천천히 백조에게 다가가선
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

954
00:47:38,583 --> 00:47:42,041
둥지 중앙엔 회색 솜털로 뒤덮인
작은 새끼 백조 두 마리가

955
00:47:42,125 --> 00:47:44,416
서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

956
00:47:44,500 --> 00:47:46,750
'알 있냐?'
어니가 물가에서 소리쳤다

957
00:47:51,416 --> 00:47:53,791
'아니' 피터가 대답했다
'아무것도 없어'

958
00:47:59,000 --> 00:48:01,666
피터는 백조를 안고 물가로 나와

959
00:48:01,750 --> 00:48:05,541
조심히 땅에 내려놓고
일어나서 두 소년을 마주 보았다

960
00:48:05,625 --> 00:48:08,833
눈물이 마르지 않은 두 눈에
분노가 불타올랐다

961
00:48:08,916 --> 00:48:11,333
'너희가 죽었어야 했어'
피터가 말했다

962
00:48:11,416 --> 00:48:14,833
어니는 잠시 움찔하는 듯하더니
곧장 정신을 차렸고

963
00:48:14,916 --> 00:48:18,000
그 작고 까만 눈동자에
위험한 불꽃이 일렁였다

964
00:48:20,291 --> 00:48:21,791
'칼 줘봐, 레이먼드'

965
00:48:24,416 --> 00:48:27,333
새의 날개와 몸이 만나는 곳엔
관절이 있는데

966
00:48:27,416 --> 00:48:30,916
어니는 그 관절을 찾아서는
칼로 그어 힘줄을 끊었다

967
00:48:31,000 --> 00:48:32,666
날카롭고 잘 드는 칼이라

968
00:48:32,750 --> 00:48:35,125
곧 한쪽 날개가
고스란히 떨어져 나왔다

969
00:48:35,208 --> 00:48:37,875
어니는 백조를 돌려놓고
반대편 날개도 자르더니

970
00:48:37,958 --> 00:48:40,458
'끈!'이라고 말하며
레이먼드에게 손을 내밀었다

971
00:48:43,000 --> 00:48:45,333
어니는 1m 길이의 끈을
8개 만들어서는

972
00:48:45,416 --> 00:48:48,791
커다란 날개 윗부분을 따라
하나씩 묶었다

973
00:48:48,875 --> 00:48:50,125
'팔 벌려'

974
00:48:53,416 --> 00:48:55,125
5월의 아름다운 아침

975
00:48:55,208 --> 00:48:57,500
햇살 가득한 호숫가에
서 있는 피터 왓슨

976
00:48:57,583 --> 00:48:59,916
피 묻은 커다란 날개가

977
00:49:00,000 --> 00:49:02,291
몸 양쪽으로
기괴하게 늘어져 있었다

978
00:49:02,375 --> 00:49:05,416
어니는 손뼉을 치더니
풀밭에서 지그를 추었다

979
00:49:12,416 --> 00:49:14,666
'끝났어?' 피터 왓슨이 물었다

980
00:49:14,750 --> 00:49:17,291
'백조는 말 못 하는데'
어니가 말했다

981
00:49:17,375 --> 00:49:21,375
세 사람은 호숫가를 따라가
커다란 버드나무 앞에 섰다

982
00:49:21,458 --> 00:49:23,916
저 높은 곳에서부터 늘어진
기다란 가지들이

983
00:49:24,000 --> 00:49:25,791
수면에 닿을 듯했다

984
00:49:26,875 --> 00:49:28,583
'할 일을 말해주지, 백조 군'

985
00:49:28,666 --> 00:49:30,750
'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'

986
00:49:30,833 --> 00:49:33,125
'날개를 펼치고 날아'

987
00:49:33,208 --> 00:49:35,041
'끝내주네!' 레이먼드가 외쳤다

988
00:49:35,125 --> 00:49:38,083
이 훌리건들을 벗어나
높이 올라간다고 생각하니

989
00:49:38,166 --> 00:49:39,708
피터는 매우 흡족했다

990
00:49:39,791 --> 00:49:41,875
일단 올라가면
안 내려올 작정이었다

991
00:49:41,958 --> 00:49:44,416
굳이 그 위까지
쫓아오진 않을 것 같았고

992
00:49:44,500 --> 00:49:45,541
혹시 올라오면

993
00:49:45,625 --> 00:49:49,125
두 사람 무게는 감당 못 할
가는 가지로 올라갈 생각이었다

994
00:49:49,208 --> 00:49:53,083
발을 디딜 낮은 가지들 덕에
올라가는 건 꽤 수월했다

995
00:49:53,166 --> 00:49:55,083
'더 높이!' 어니가 소리쳤다
'계속 올라가!'

996
00:49:55,166 --> 00:49:58,333
마침내 더 올라갈 곳이 없는
지점에 도달했다

997
00:49:58,416 --> 00:50:01,458
남자 손목 정도 굵기의
가지에 올라섰는데

998
00:50:01,541 --> 00:50:05,833
호수 중앙 쪽으로 뻗은 다음
우아하게 늘어진 가지였다

999
00:50:05,916 --> 00:50:07,875
피터는 거기 서서 숨을 돌렸다

1000
00:50:07,958 --> 00:50:11,500
15m 이상 되는 높이인데
두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

1001
00:50:11,583 --> 00:50:14,208
둘 다 나무 아래에 없었다

1002
00:50:14,291 --> 00:50:15,458
'내 말 잘 들어'

1003
00:50:15,541 --> 00:50:17,375
꼭대기의 작은 소년을 잘 보려고

1004
00:50:17,458 --> 00:50:20,791
나무에서 멀찍이
떨어진 곳으로 간 것이다

1005
00:50:20,875 --> 00:50:23,041
피터 왓슨은
그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

1006
00:50:23,125 --> 00:50:26,125
버드나무 잎이 굉장히 성기고
가늘다는 걸 깨달았다

1007
00:50:26,208 --> 00:50:28,083
가림막 역할을 못 하는 것이다

1008
00:50:28,166 --> 00:50:30,125
'그 가지 끝으로 걸어가'

1009
00:50:30,208 --> 00:50:34,083
'그 걸쭉한 물 위까지 가서
날아오르는 거야!'

1010
00:50:34,166 --> 00:50:35,916
피터 왓슨은 움직이지 않았다

1011
00:50:36,000 --> 00:50:38,916
저 멀리 땅에 서 있는
두 형체를 바라보았다

1012
00:50:39,000 --> 00:50:41,458
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
피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

1013
00:50:41,541 --> 00:50:45,083
'열 셀 때까지
날개 펴고 날지 않으면'

1014
00:50:45,166 --> 00:50:46,541
'쏴버릴 줄 알아'

1015
00:50:46,625 --> 00:50:49,083
'그럼 하루에
백조를 두 마리나 잡는 거네'

1016
00:50:49,166 --> 00:50:50,541
'시작한다'

1017
00:50:50,625 --> 00:50:56,333
'하나, 둘, 셋, 넷, 다섯, 여섯'

1018
00:50:56,416 --> 00:51:00,791
피터 왓슨은 그대로 서 있었다
누가 뭐래도 안 움직일 터였다

1019
00:51:00,875 --> 00:51:04,166
'일곱, 여덟, 아홉, 열'

1020
00:51:04,250 --> 00:51:08,166
피터 왓슨은 어니가 자신을 향해
총을 겨누는 모습을 보았다

1021
00:51:08,250 --> 00:51:09,833
총이 발사되는 소리와

1022
00:51:09,916 --> 00:51:12,625
머리 옆을 휙 지나가는
총알 소리를 들었다

1023
00:51:16,000 --> 00:51:17,958
두렵지만 움직이지 않았다

1024
00:51:18,041 --> 00:51:20,291
어니가 장전하는 모습이 보였다

1025
00:51:20,375 --> 00:51:23,500
'마지막 기회다!' 어니가 외쳤다
'다음엔 명중할 거야!'

1026
00:51:23,583 --> 00:51:24,416
피터는 기다렸다

1027
00:51:24,500 --> 00:51:27,083
저 멀리 미나리아재비 풀숲에서

1028
00:51:27,166 --> 00:51:30,916
또 다른 소년을 옆에 두고 선
한 소년이 또 다시 총을 겨누었다

1029
00:51:31,000 --> 00:51:34,291
이번에는 총알이 허벅지에
박히는 소리가 들렸다

1030
00:51:34,375 --> 00:51:37,083
아프진 않았지만
그 여파가 엄청났다

1031
00:51:37,166 --> 00:51:40,083
누군가 큰 망치로
다리를 내리친 듯한 충격에

1032
00:51:40,166 --> 00:51:42,875
가지를 딛고 있던
두 발이 균형을 잃었고

1033
00:51:42,958 --> 00:51:44,916
가지를 붙잡으려 허우적댔다

1034
00:51:45,000 --> 00:51:48,208
겨우 잡은 작은 가지는
구부러지더니 부러졌다

1035
00:51:57,375 --> 00:52:01,833
어떤 이들은 궁지에 몰려
더 감내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

1036
00:52:01,916 --> 00:52:04,458
그대로 꺾이고 무너져 포기한다

1037
00:52:04,541 --> 00:52:06,666
하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

1038
00:52:06,750 --> 00:52:10,333
어째선지 절대로
꺾이지 않는 이들도 있다

1039
00:52:10,416 --> 00:52:13,666
그런 이들은 전쟁 중에도
평화로울 때도 눈에 띈다

1040
00:52:13,750 --> 00:52:15,791
불굴의 의지를 지닌 그들은

1041
00:52:15,875 --> 00:52:19,416
고통이나 고문에도
목숨이 위험해져도

1042
00:52:19,500 --> 00:52:21,083
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

1043
00:52:21,708 --> 00:52:24,166
어린 피터 왓슨도 그런 사람이었다

1044
00:52:24,250 --> 00:52:28,833
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
발버둥 치고 애쓰는 동안

1045
00:52:28,916 --> 00:52:32,708
자신이 이길 거라는 확신이
문득 찾아왔다

1046
00:52:32,791 --> 00:52:36,791
고개를 들어보니 호수에
밝은 빛이 물결치고 있었고

1047
00:52:36,875 --> 00:52:40,625
그 눈부신 아름다움에
눈을 뗄 수가 없었다

1048
00:52:40,708 --> 00:52:43,958
그 빛은 그를 손짓해 부르며
끌어당겼다

1049
00:52:44,041 --> 00:52:46,166
피터는 그 빛을 향해 몸을 던지며

1050
00:52:46,750 --> 00:52:48,083
두 날개를 활짝 폈다

1051
00:52:49,750 --> 00:52:53,625
그날 아침 마을 상공을 나는
거대한 백조를 봤다는 이가

1052
00:52:53,708 --> 00:52:54,875
세 명 있었다

1053
00:52:54,958 --> 00:52:55,958
교사

1054
00:52:56,041 --> 00:52:58,833
잡화점 지붕 타일을
교체하던 작업자

1055
00:52:58,916 --> 00:53:01,250
그리고 근처 들판에서 놀던 소년

1056
00:53:01,333 --> 00:53:04,333
왓슨의 어머니는
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다가

1057
00:53:04,416 --> 00:53:06,250
문득 고갤 들어 창밖을 봤는데

1058
00:53:06,333 --> 00:53:09,125
바로 그 순간에
커다랗고 하얀 무언가가

1059
00:53:09,208 --> 00:53:11,958
하늘에서 떨어져
집 뒤뜰 잔디밭에 추락했다

1060
00:53:12,791 --> 00:53:14,458
급히 나가 보았다

1061
00:53:14,541 --> 00:53:18,416
그리고 쓰러져 있는 외동아들 옆에
털썩 무릎을 꿇었다

1062
00:53:19,250 --> 00:53:22,291
'우리 아가!' 그녀가 울부짖었다
'사랑하는 내 아들!'

1063
00:53:24,625 --> 00:53:25,875
'어쩌다 이렇게 됐니?'

1064
00:53:30,083 --> 00:53:33,958
"'백조'는 실제로 신문에 실렸던
사건에 영감을 받은 작품이며"

1065
00:53:34,041 --> 00:53:37,750
"달은 이 이야기를 30년간
'아이디어 북'에 간직했다가"

1066
00:53:37,833 --> 00:53:40,000
"1976년 10월에 집필했다"

1067
00:53:46,583 --> 00:53:52,833
"쥐잡이 사내"

1068
00:53:52,916 --> 00:53:59,875
"오늘의 뉴스"

1069
00:54:01,166 --> 00:54:04,375
쥐잡이 사내가 주유소에
도착한 것은 오후였다

1070
00:54:04,458 --> 00:54:07,375
조용조용 발소리 하나 없이
진입로로 들어섰다

1071
00:54:07,458 --> 00:54:09,791
자갈을 밟는데도
소리가 전혀 안 났다

1072
00:54:09,875 --> 00:54:12,458
한쪽 어깨엔 군용 가방을 멨고

1073
00:54:12,541 --> 00:54:15,208
커다란 주머니가 달린
구식 코듀로이 재킷에

1074
00:54:15,291 --> 00:54:18,958
코듀로이 바지는 무릎 부분이
흰색 끈으로 동여매져 있었다

1075
00:54:19,041 --> 00:54:20,125
- 계십니까?
- 네

1076
00:54:20,208 --> 00:54:21,083
설치류 처리반입니다

1077
00:54:21,166 --> 00:54:23,916
작고 까만 눈동자를 굴려
주변을 둘러보았다

1078
00:54:24,000 --> 00:54:25,208
- 쥐 잡으러 오셨군요
- 맞습니다

1079
00:54:25,291 --> 00:54:27,458
탄탄한 몸, 거친 피부, 긴 얼굴

1080
00:54:27,541 --> 00:54:31,291
누런 앞니 두 개가
길게 뻗어 아랫입술을 덮었다

1081
00:54:31,375 --> 00:54:34,333
얇고 둥근 귀는
거의 뒤통수까지 뻗어 있었다

1082
00:54:34,416 --> 00:54:36,000
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까웠지만

1083
00:54:36,083 --> 00:54:39,083
사람을 볼 때면
안쪽엔 노란 기가 돌았다

1084
00:54:39,166 --> 00:54:41,666
- 빨리 오셨네요
- 보건국 특별 지시가 있어서요

1085
00:54:41,750 --> 00:54:43,958
보건국이요?
쥐를 다 잡을 겁니까?

1086
00:54:44,041 --> 00:54:44,958
- 그렇죠
- 어떻게요?

1087
00:54:45,041 --> 00:54:45,875
궁금하네요

1088
00:54:45,958 --> 00:54:49,166
쥐의 종류와 위치에 따라
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

1089
00:54:49,250 --> 00:54:50,541
- 덫을 놓겠죠?
- 네?

1090
00:54:50,625 --> 00:54:51,541
- 덫이요
- 덫이요?

1091
00:54:51,625 --> 00:54:52,541
쥐잡이가 코웃음을 쳤다

1092
00:54:52,625 --> 00:54:54,666
그렇겐 못 잡아요
쥐가 토끼도 아니고

1093
00:54:54,750 --> 00:54:56,000
쥐잡이는 고개를 쳐들더니

1094
00:54:56,083 --> 00:54:59,708
코를 좌우로 실룩대며
냄새를 맡았다

1095
00:54:59,791 --> 00:55:02,666
쥐는 영리합니다
잡으려면 파악부터 해야죠

1096
00:55:03,250 --> 00:55:04,916
이 일을 하려면
쥐를 잘 알아야 해요

1097
00:55:09,208 --> 00:55:11,541
쥐들은 사람을 지켜봅니다

1098
00:55:11,625 --> 00:55:15,333
쥐를 박멸하려고 준비하는 내내
사람을 지켜보죠

1099
00:55:15,416 --> 00:55:17,208
하수관 작업은 아니겠죠?

1100
00:55:17,291 --> 00:55:18,875
하수관은 아닙니다

1101
00:55:18,958 --> 00:55:21,416
- 하수관 작업은 까다롭죠
- 안 그럴 것 같은데요

1102
00:55:21,500 --> 00:55:24,583
그렇게 생각하신다?
직접 해보시면 알겠죠

1103
00:55:24,666 --> 00:55:27,333
어떤 전략으로 접근하실지
궁금해지네요

1104
00:55:27,416 --> 00:55:28,583
약을 쓰겠죠

1105
00:55:28,666 --> 00:55:30,833
약을 어디에 놓을 겁니까?

1106
00:55:30,916 --> 00:55:31,750
하수관에 풀겠죠

1107
00:55:31,833 --> 00:55:33,333
사내의 얼굴이 승리감으로 빛났다

1108
00:55:33,416 --> 00:55:35,125
역시 하수관에 풀겠다?

1109
00:55:35,208 --> 00:55:37,541
그럼 어떻게 될까요?
싹 쓸려 내려갑니다

1110
00:55:37,625 --> 00:55:39,541
약이 싹 사라져요
하수관은 강 같거든요

1111
00:55:39,625 --> 00:55:42,791
그럼 박멸 전문가께서는
어떻게 하실까요?

1112
00:55:42,875 --> 00:55:44,666
사내는 한 걸음 다가서서는

1113
00:55:44,750 --> 00:55:46,916
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목소리로

1114
00:55:47,000 --> 00:55:49,625
대단한 영업 비밀이라도
알려주는 듯 말했다

1115
00:55:49,708 --> 00:55:52,833
쥐가 뭐든 갉아댄다는 건 아시죠?

1116
00:55:52,916 --> 00:55:55,375
뭐든 일단 갉아대고 보죠

1117
00:55:55,458 --> 00:55:58,500
하수구의 쥐를 잡을 땐
어떻게 해야 하느냐?

1118
00:55:58,583 --> 00:56:01,416
그의 목소리는
꾸룩대는 개구리 소리 같았고

1119
00:56:01,500 --> 00:56:04,583
입에 침이 고이기라도 한 듯
한 마디 한 마디를 하는 모습이

1120
00:56:04,666 --> 00:56:06,625
마치 음미하는 듯했다

1121
00:56:06,708 --> 00:56:10,333
평범한 종이봉투를 들고
하수구로 들어갑니다

1122
00:56:10,416 --> 00:56:13,083
봉투에는 오로지
석고 가루만 들어 있죠

1123
00:56:13,166 --> 00:56:15,500
하수구 천장에 봉투를 매달아

1124
00:56:15,583 --> 00:56:18,291
물에 닿지 않을 정도로
드리워야 해요

1125
00:56:18,375 --> 00:56:20,041
쥐의 앞발이 닿을 정도로만요

1126
00:56:20,125 --> 00:56:21,541
클로드는 넋 나간 듯 들었다

1127
00:56:21,625 --> 00:56:26,291
헤엄쳐 오던 늙은 쥐 한 마리가
봉투를 보고 멈춥니다

1128
00:56:26,375 --> 00:56:28,500
킁킁대 보니 냄새가 나쁘지 않자

1129
00:56:28,583 --> 00:56:30,083
- 어떻게 할까요?
- 갉아대겠죠

1130
00:56:30,166 --> 00:56:33,125
맞아요, 쥐가 갉아대면
봉투가 찢어지고

1131
00:56:33,208 --> 00:56:36,625
쥐는 노력의 대가로
입안 가득 석고 가루를 얻겠죠

1132
00:56:36,708 --> 00:56:37,541
그다음엔요?

1133
00:56:37,625 --> 00:56:38,916
끝나는 거죠

1134
00:56:39,625 --> 00:56:41,041
- 죽는다고요?
- 꼴까닥합니다

1135
00:56:41,125 --> 00:56:43,375
- 석고 가루에?
- 젖으면 부풀잖아요

1136
00:56:43,458 --> 00:56:45,666
목구멍에 들어가자마자
부풀어 오르고

1137
00:56:45,750 --> 00:56:48,291
무엇보다 빠르게 쥐를 죽입니다

1138
00:56:48,375 --> 00:56:50,083
이래서 쥐에 대해
잘 알아야 한다니까요

1139
00:56:50,166 --> 00:56:52,208
남자는 우쭐함에 얼굴을 빛내며

1140
00:56:52,291 --> 00:56:56,208
지저분한 두 손을 모으더니
얼굴 가까이 가져갔다

1141
00:56:57,791 --> 00:57:00,166
자, 쥐들은 어디 있나요?

1142
00:57:00,250 --> 00:57:03,041
'쥐'라는 단어가
얼마나 기름지고 질척한지

1143
00:57:03,125 --> 00:57:04,916
녹인 버터로 가글하는 듯했다

1144
00:57:05,000 --> 00:57:06,583
저 길 건너편 건초더미에요

1145
00:57:06,666 --> 00:57:09,041
- 실내엔 없고요?
- 건초더미에만 있어요

1146
00:57:09,125 --> 00:57:13,541
실내에도 있을 겁니다
음식을 깔짝대며 병을 퍼뜨리겠죠

1147
00:57:13,625 --> 00:57:16,875
- 병이 돌진 않습니까?
- 나와 클로드를 차례로 쳐다봤다

1148
00:57:16,958 --> 00:57:18,458
- 아픈 사람은 없어요
- 확실한가요?

1149
00:57:18,541 --> 00:57:20,166
- 확실합니다
- 모르는 일이죠

1150
00:57:20,250 --> 00:57:23,000
보건국 직원의 탈을 쓰고선

1151
00:57:23,083 --> 00:57:25,833
림프절 페스트가
돌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했다

1152
00:57:25,916 --> 00:57:29,416
어쨌든 건초더미에 쥐들이 있는데
어떻게 없앨 겁니까?

1153
00:57:29,500 --> 00:57:31,750
사내는 이를 드러내며
교활한 웃음을 짓더니

1154
00:57:31,833 --> 00:57:34,250
가방에서 커다란 양철통을
꺼내 들고는

1155
00:57:34,333 --> 00:57:36,750
무게를 재듯
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

1156
00:57:36,833 --> 00:57:39,208
특별하고 치명적인 약입니다

1157
00:57:39,291 --> 00:57:42,958
아주 조금만 갖고 있다가 걸려도
6개월은 감옥에서 썩을 겁니다

1158
00:57:43,041 --> 00:57:45,250
이 정도 양이면
백만 명을 죽일 수 있어요

1159
00:57:45,333 --> 00:57:46,666
- 보실래요?
- 보여주세요

1160
00:57:46,750 --> 00:57:48,916
사내는 동전을 꺼내
지렛대 삼아 뚜껑을 열었다

1161
00:57:49,000 --> 00:57:49,833
이것 좀 보세요

1162
00:57:49,916 --> 00:57:53,500
사랑스럽다는 듯 깡통을 들어
클로드에게 보여줬다

1163
00:57:53,583 --> 00:57:55,125
옥수수인가요, 보리인가요?

1164
00:57:55,208 --> 00:57:57,583
치명적인 약을
잔뜩 머금은 귀리입니다

1165
00:57:57,666 --> 00:58:01,333
한 알만 입에 넣어도
3분 안에 저세상행이죠

1166
00:58:01,416 --> 00:58:03,458
이 통은 각별히 보관합니다

1167
00:58:03,541 --> 00:58:05,875
그가 통을 소중히 감싸 쥐고
살짝 흔들자

1168
00:58:06,791 --> 00:58:09,000
귀리 알갱이들이 바스락거렸다

1169
00:58:09,083 --> 00:58:12,375
하지만 오늘은 안 줄 겁니다
줘 봤자 안 먹을 거거든요

1170
00:58:12,458 --> 00:58:16,750
그게 쥐의 습성이죠
극도로 의심이 많아요

1171
00:58:16,833 --> 00:58:19,375
오늘은 깨끗하고 맛있는
귀리를 줄 겁니다

1172
00:58:19,458 --> 00:58:22,750
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죠
기껏해야 살찌는 정도려나

1173
00:58:22,833 --> 00:58:26,541
내일도 똑같이 할 겁니다
그다음 날도, 또 다음 날도

1174
00:58:26,625 --> 00:58:31,083
귀리 맛이 좋다고 소문나서
곧 온 동네 쥐들이 모여들겠죠

1175
00:58:31,166 --> 00:58:32,000
영리하네요

1176
00:58:32,083 --> 00:58:34,958
이 일을 하려면
쥐보다 영리해야 합니다

1177
00:58:35,041 --> 00:58:36,500
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죠

1178
00:58:36,583 --> 00:58:38,000
'아예 쥐가 돼야겠네요'

1179
00:58:38,083 --> 00:58:40,625
생각할 틈도 없이
그냥 튀어나와 버렸다

1180
00:58:40,708 --> 00:58:43,333
사내를 보고 있자니
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

1181
00:58:43,416 --> 00:58:45,166
그런데 반응이 놀라웠다

1182
00:58:45,250 --> 00:58:46,208
- 맞아요!
- 그가 외쳤다

1183
00:58:46,291 --> 00:58:48,083
진짜 제대로 이해하셨군요

1184
00:58:48,166 --> 00:58:51,458
훌륭한 쥐 박멸 전문가라면
누구보다 쥐와 닮아야 하고

1185
00:58:51,541 --> 00:58:55,583
쥐보다 영리해야 하는데
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

1186
00:58:56,750 --> 00:58:58,208
바쁘니까 시작해야겠네요

1187
00:58:58,291 --> 00:59:01,500
레이디 리어노라 벤슨이
저택에 빨리 와달라고 해서요

1188
00:59:01,583 --> 00:59:02,666
거기도 쥐가 있답니까?

1189
00:59:02,750 --> 00:59:04,583
쥐는 어디에나 있습니다

1190
00:59:04,666 --> 00:59:06,958
쥐잡이 사내는
진입로를 천천히 걸어갔다

1191
00:59:07,041 --> 00:59:09,875
걸음걸이가 놀라울 만큼
쥐랑 똑같았다

1192
00:59:09,958 --> 00:59:13,541
무릎의 탄성을 이용한
느긋하면서 섬세한 걸음

1193
00:59:13,625 --> 00:59:15,958
자갈을 밟는데
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

1194
00:59:16,625 --> 00:59:18,541
그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더니

1195
00:59:18,625 --> 00:59:22,333
건초더미 주위를 빠르게 돌며
귀리 몇 줌을 땅에 뿌렸다

1196
00:59:22,416 --> 00:59:25,000
다음 날 다시 와서
같은 작업을 반복했다

1197
00:59:25,083 --> 00:59:28,000
그다음 날에도 왔고
또 그다음 날에도 왔다

1198
00:59:28,083 --> 00:59:31,416
그리고 드디어 나흘째에
약에 적신 귀리가 등장했다

1199
00:59:31,500 --> 00:59:33,083
그런데 이번엔 뿌리지 않고

1200
00:59:33,166 --> 00:59:36,375
건초더미 주위 몇 군데에
한 무더기씩 두었다

1201
00:59:39,291 --> 00:59:40,958
- 개가 있습니까?
- 네

1202
00:59:41,041 --> 00:59:44,916
개가 끔찍하게 죽길 바라지 않으면
울타리 못 넘어오게 하세요

1203
00:59:45,000 --> 00:59:47,083
다음 날 사체를 수거하러 왔다

1204
00:59:47,166 --> 00:59:49,875
죽은 쥐 좀 넣게
낡은 자루 하나 주십쇼

1205
00:59:49,958 --> 00:59:53,458
득의양양한 태도로
검은 눈동자엔 자신감이 가득했다

1206
00:59:53,541 --> 00:59:56,791
이제 곧 대단한 성과를
선보일 참인 것이다

1207
00:59:56,875 --> 00:59:59,750
클로드가 자루를 가져왔고
다 같이 길 건너편으로 갔다

1208
00:59:59,833 --> 01:00:01,541
사내는 건초더미 주변을 돌며

1209
01:00:01,625 --> 01:00:04,416
몸을 숙여 독약 귀리 무더기를
들여다보았다

1210
01:00:04,500 --> 01:00:06,375
- 뭔가 이상하네
- 그가 중얼거렸다

1211
01:00:06,458 --> 01:00:07,916
낮은 목소리에 화가 가득했다

1212
01:00:08,000 --> 01:00:11,458
다른 귀리 무더기 쪽으로 가더니
엎드려서 자세히 들여다봤다

1213
01:00:11,541 --> 01:00:13,958
- 뭔가 단단히 잘못됐어
- 왜 그래요?

1214
01:00:14,041 --> 01:00:17,125
대답은 없었지만 쥐들이 미끼를
건드리지 않은 건 분명해 보였다

1215
01:00:17,208 --> 01:00:19,333
'쥐들이 엄청 영리한가 봅니다'
내가 말했다

1216
01:00:19,416 --> 01:00:22,666
그는 내 말에 짜증이 났고
얼굴과 코에 감정이 드러났으며

1217
01:00:22,750 --> 01:00:26,125
누런 앞니 두 개는
아랫입술을 파고들 듯했다

1218
01:00:26,208 --> 01:00:28,708
- 헛소리하지 마쇼
- 그가 날 보며 말했다

1219
01:00:28,791 --> 01:00:31,625
쥐가 문제가 아니라
어디서 뭘 먹고 온 겁니다

1220
01:00:31,708 --> 01:00:34,458
맛난 먹이를
배부르게 먹은 거예요

1221
01:00:34,541 --> 01:00:38,625
배가 터질 듯 부르지 않고서야
귀리를 마다할 쥐는 없어요

1222
01:00:38,708 --> 01:00:40,333
쥐잡이 사내는
시무룩하게 돌아섰다

1223
01:00:40,416 --> 01:00:43,916
무릎을 꿇고 앉아 모종삽으로
독약 귀리를 푸더니

1224
01:00:44,000 --> 01:00:46,166
조심스럽게 깡통에 담았다

1225
01:00:46,250 --> 01:00:49,833
작업이 끝난 후, 우리 셋은
다시 길을 건너 돌아왔다

1226
01:00:50,916 --> 01:00:52,791
주유기 옆에 선 쥐잡이 사내는

1227
01:00:52,875 --> 01:00:54,791
침울하고 초라해 보였고

1228
01:00:54,875 --> 01:00:57,541
얼굴에 음울한 빛이 돌기 시작했다

1229
01:00:57,625 --> 01:01:01,416
실패감에 위축된 듯했고
속 모를 눈동자는 음산했다

1230
01:01:01,500 --> 01:01:04,750
누런 앞니 한쪽 옆으로
혀를 살짝 내밀었다

1231
01:01:04,833 --> 01:01:08,000
음침한 눈길로 나를 한 번 보고
클로드를 돌아보았다

1232
01:01:08,083 --> 01:01:10,083
코끝을 씰룩이며 냄새를 맡고

1233
01:01:10,166 --> 01:01:13,208
발뒤꿈치를 들었다 놨다 하며
천천히 몸을 흔들더니

1234
01:01:13,291 --> 01:01:15,833
조용하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

1235
01:01:15,916 --> 01:01:17,250
뭐 하나 보여드릴까?

1236
01:01:17,333 --> 01:01:19,625
실추된 명예를
되찾으려는 게 분명했다

1237
01:01:19,708 --> 01:01:21,791
- 뭔데요?
- 굉장한 거 보여드려요?

1238
01:01:21,875 --> 01:01:24,916
오른손을 재킷의 건빵 주머니
깊숙이 집어넣더니

1239
01:01:25,000 --> 01:01:28,541
살아 있는 커다란 쥐를 꺼냈는데
두 손가락으로 꽉 움켜쥔 채였다

1240
01:01:28,625 --> 01:01:29,541
맙소사!

1241
01:01:30,208 --> 01:01:31,166
굉장하지요?

1242
01:01:31,250 --> 01:01:34,625
몸을 움츠리고 목을 길게 뺀 채
능글맞은 얼굴로 우릴 보며

1243
01:01:34,708 --> 01:01:36,916
커다란 갈색 쥐를 들고 있는데

1244
01:01:37,000 --> 01:01:40,000
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듯
쥐의 목을 잡고

1245
01:01:40,083 --> 01:01:42,416
고개 돌려 물지 못하게
단단히 틀어쥐었다

1246
01:01:42,500 --> 01:01:44,333
주머니에 쥐를 넣고 다닙니까?

1247
01:01:44,416 --> 01:01:46,375
쥐 한두 마리쯤은
늘 지니고 다니지요

1248
01:01:46,458 --> 01:01:50,000
다른 손을 다른 주머니에 넣더니
꺼내 든 것은 작고 하얀…

1249
01:01:50,083 --> 01:01:52,625
- 페럿입니까?
- 사내는 쇳소리를 내며 킥킥댔다

1250
01:01:52,708 --> 01:01:55,416
페럿은 주인을 알아보는 듯
손안에서 얌전히 있었다

1251
01:01:55,500 --> 01:01:57,791
페럿은 누구보다 빠르게
쥐를 죽이지요

1252
01:01:57,875 --> 01:02:00,125
그리고는 두 짐승 사이의
거리를 좁혔고

1253
01:02:00,208 --> 01:02:03,458
이제 페럿의 코와 쥐의 얼굴은
15cm밖에 떨어지지 않았다

1254
01:02:03,541 --> 01:02:06,125
페럿의 핑크빛 눈이
쥐를 노려보았다

1255
01:02:06,208 --> 01:02:08,916
쥐는 천적에게서 멀어지려
발버둥을 쳤다

1256
01:02:09,000 --> 01:02:10,125
- 자
- 사내가 말했다

1257
01:02:10,208 --> 01:02:11,041
잘 봐요

1258
01:02:13,041 --> 01:02:15,166
카키색 셔츠의 단추가
두어 개 풀려 있었는데

1259
01:02:15,250 --> 01:02:18,625
맨살뿐인 셔츠 안으로
쥐를 집어넣었다

1260
01:02:18,708 --> 01:02:21,625
벨트 때문에 쥐는 허리 아래로
내려갈 수 없었다

1261
01:02:21,708 --> 01:02:23,291
그다음엔 페럿을 집어넣었다

1262
01:02:23,375 --> 01:02:26,250
셔츠 안에서는 소동이 일어났다

1263
01:02:26,333 --> 01:02:29,916
쥐가 페럿을 피하려고
사내의 몸을 둘러 달리는 듯했다

1264
01:02:30,000 --> 01:02:33,750
6, 7바퀴를 도는 동안
작은 덩어리와 큰 덩어리 사이가

1265
01:02:33,833 --> 01:02:36,916
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더니

1266
01:02:37,000 --> 01:02:39,625
결국 두 덩어리가
하나가 되는 듯 보였고

1267
01:02:39,708 --> 01:02:42,416
실랑이가 벌어졌으며
날카로운 비명이 이어졌다

1268
01:02:42,500 --> 01:02:45,666
공연이 진행되는 동안
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

1269
01:02:45,750 --> 01:02:47,958
두 다리를 벌리고
두 팔은 살짝 늘어뜨린 채

1270
01:02:48,041 --> 01:02:51,083
클로드의 얼어붙은 얼굴을
까만 눈동자로 주시했다

1271
01:02:51,958 --> 01:02:55,666
마침내 셔츠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

1272
01:02:55,750 --> 01:02:57,416
페럿을 꺼냈고

1273
01:02:57,500 --> 01:02:59,875
다른 손으로는 죽은 쥐를 꺼냈다

1274
01:02:59,958 --> 01:03:03,166
페럿의 하얀 주둥이엔
피가 묻어 있었다

1275
01:03:04,416 --> 01:03:06,708
'유쾌한 광경은 아니네요'
내가 말했다

1276
01:03:06,791 --> 01:03:09,708
이런 광경은 전에 본 적 없겠죠

1277
01:03:09,791 --> 01:03:11,083
대체로 그렇죠

1278
01:03:11,166 --> 01:03:13,833
계속 그러다가는
결국 배를 물릴 겁니다

1279
01:03:13,916 --> 01:03:16,166
하지만 클로드는
분명 흥미로워했고

1280
01:03:16,250 --> 01:03:17,750
사내는 다시 우쭐해졌다

1281
01:03:17,833 --> 01:03:19,958
더 굉장한 걸 보여드릴까?

1282
01:03:20,041 --> 01:03:23,125
직접 보지 않고는
절대 못 믿을 모습을요

1283
01:03:23,208 --> 01:03:25,750
나는 꽤나 걱정이 돼서
클로드를 흘끗 봤다

1284
01:03:27,791 --> 01:03:28,625
그럽시다

1285
01:03:29,375 --> 01:03:32,833
사내는 죽은 쥐를 한쪽 주머니에
페럿을 다른 주머니에 넣었다

1286
01:03:32,916 --> 01:03:36,833
그러더니 가방을 뒤져
두 번째 살아 있는 쥐를 꺼냈다

1287
01:03:36,916 --> 01:03:37,750
이런, 맙소사!

1288
01:03:37,833 --> 01:03:40,208
늘 한두 마리쯤은
갖고 다닌다니까요

1289
01:03:40,291 --> 01:03:42,125
이 일을 하려면
쥐를 잘 알아야 하고

1290
01:03:42,208 --> 01:03:44,625
그러려면 늘 곁에 둬야 하니까요

1291
01:03:44,708 --> 01:03:48,291
이놈은 늙은 시궁쥐인데
지독하게 영리한 놈입니다

1292
01:03:48,375 --> 01:03:51,916
이번엔 뭘 하려나, 하며
날 바라보곤 하지요

1293
01:03:52,000 --> 01:03:53,333
- 보이죠?
- 매우 불쾌한 광경이다

1294
01:03:53,416 --> 01:03:54,875
'어쩔 셈인가요?'
내가 물었다

1295
01:03:54,958 --> 01:03:58,083
좀 전의 공연보다
더 별로일 듯한 느낌이 들었다

1296
01:03:58,166 --> 01:04:01,250
- 끈 하나만 주시지요
- 클로드가 끈을 하나 줬고

1297
01:04:01,333 --> 01:04:03,708
사내는 쥐의 한쪽 뒷다리를 묶었다

1298
01:04:03,791 --> 01:04:06,583
쥐가 발버둥쳤지만
손아귀에서 꼼짝 못 했다

1299
01:04:06,666 --> 01:04:08,208
안에 탁자가 있습니까?

1300
01:04:08,291 --> 01:04:10,250
'실내엔 못 들입니다'
내가 말했다

1301
01:04:10,333 --> 01:04:12,708
탁자든 뭐든 평평한 게 필요합니다

1302
01:04:12,791 --> 01:04:16,041
우린 주유기 쪽으로 갔고
사내는 시궁쥐를 그 위에 올려놨다

1303
01:04:16,125 --> 01:04:19,625
그리고 쥐가 도망 못 가도록
기둥에 줄을 묶었다

1304
01:04:19,708 --> 01:04:22,166
쥐는 웅크린 채
미동도 않고 경계했다

1305
01:04:22,250 --> 01:04:24,500
커다란 회색 쥐는
검은 눈동자를 빛냈고

1306
01:04:24,583 --> 01:04:28,083
비늘로 덮인 긴 꼬리는
철제 주유기 위에 늘어져 있었다

1307
01:04:28,166 --> 01:04:29,750
쥐는 사내에게서 눈을 거뒀지만

1308
01:04:29,833 --> 01:04:32,333
어쩌려는지 살피듯
곁눈질로 쳐다보았다

1309
01:04:32,416 --> 01:04:36,083
사내가 몇 발짝 물러서자
쥐는 곧장 긴장을 풀었다

1310
01:04:36,166 --> 01:04:39,875
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더니
가슴의 회색 털을 핥기 시작했다

1311
01:04:39,958 --> 01:04:42,500
그러고는 양쪽 앞발로
주둥이를 긁었다

1312
01:04:42,583 --> 01:04:45,791
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겐
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

1313
01:04:45,875 --> 01:04:48,250
- 내기 하나 할까요?
- 사내가 말했다

1314
01:04:48,333 --> 01:04:49,791
'됐습니다' 내가 말했다

1315
01:04:49,875 --> 01:04:53,125
- 내기하면 더 재밌을 텐데요
- 무슨 내기를 하게요?

1316
01:04:53,208 --> 01:04:56,166
손을 쓰지 않고
저 쥐를 죽여보겠습니다

1317
01:04:56,250 --> 01:04:58,375
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죠

1318
01:04:58,458 --> 01:05:01,166
돈을 좀 벌어보겠다는
심산이 분명했다

1319
01:05:01,250 --> 01:05:04,541
곧 죽을 쥐를 보니
속이 울렁거렸다

1320
01:05:04,625 --> 01:05:06,541
쥐가 죽을 거라는 사실보다는

1321
01:05:06,625 --> 01:05:09,083
특별한 방식으로 죽을 거라는
사실 때문이었다

1322
01:05:09,166 --> 01:05:11,291
그것도 아주 잔혹하게

1323
01:05:11,375 --> 01:05:13,375
- 발로 차려고요?
- 발도 안 씁니다

1324
01:05:13,458 --> 01:05:15,916
- 팔은요
- 팔, 다리, 손, 다 안 써요

1325
01:05:16,000 --> 01:05:17,500
- 깔고 앉으려나?
- 안 뭉갭니다

1326
01:05:17,583 --> 01:05:19,500
- 어디 봅시다
- 우선 1파운드 거시죠

1327
01:05:19,583 --> 01:05:21,416
어림없는 소리, 내가 왜요?

1328
01:05:21,500 --> 01:05:23,125
- 얼마나 걸 겁니까?
- 안 걸어요

1329
01:05:23,208 --> 01:05:25,083
그럼 관둡시다

1330
01:05:25,166 --> 01:05:27,500
- 사내는 끈을 푸는 시늉을 했다
- 1실링 걸죠

1331
01:05:27,583 --> 01:05:29,583
속이 아까보다 더 울렁거렸지만

1332
01:05:29,666 --> 01:05:32,291
이 모든 상황엔
묘하게 자석 같은 힘이 있었고

1333
01:05:32,375 --> 01:05:34,791
나는 그 자리를 뜨긴커녕
움직일 수도 없었다

1334
01:05:34,875 --> 01:05:35,833
- 댁도 할 거요?
- 아뇨

1335
01:05:35,916 --> 01:05:37,625
1실링에 이걸 하라고요?

1336
01:05:37,708 --> 01:05:39,666
- 하라곤 안 했는데요
- 돈은요?

1337
01:05:39,750 --> 01:05:41,541
클로드가 주유기 위에
1실링을 올려놨고

1338
01:05:41,625 --> 01:05:44,416
사내는 클로드의 돈 옆에
6펜스 동전 두 개를 놓았다

1339
01:05:44,500 --> 01:05:45,333
내기하는 겁니다

1340
01:05:45,416 --> 01:05:48,000
클로드와 나는 물러섰고
사내는 앞으로 다가섰다

1341
01:05:48,083 --> 01:05:51,833
두 손을 주머니에 넣더니
상체를 쥐 쪽으로 기울였다

1342
01:05:51,916 --> 01:05:53,500
쥐가 경계하며 웅크렸다

1343
01:05:53,583 --> 01:05:56,166
사내에게 달려들려는 듯하더니

1344
01:05:56,250 --> 01:05:57,958
이내 물러나기 시작했다

1345
01:05:58,041 --> 01:06:00,416
웅크린 채 천천히
뒤로 물러나다 보니

1346
01:06:00,500 --> 01:06:02,625
뒷다리에 묶은 줄이 팽팽해졌다

1347
01:06:02,708 --> 01:06:04,833
사내는 쥐 쪽으로
몸을 더 기울였다

1348
01:06:04,916 --> 01:06:07,500
까만 눈으로
쥐를 지켜보는데 갑자기…

1349
01:06:07,583 --> 01:06:10,208
- 쥐가 발작했다
- 쥐가 발작하며 몸을 날렸다

1350
01:06:13,083 --> 01:06:16,708
줄이 확 당겨지면서
다리가 탈골 직전까지 갔다

1351
01:06:16,791 --> 01:06:20,166
쥐는 줄이 닿는 한 최대한 멀리
주유기 끝으로 기어갔다

1352
01:06:20,250 --> 01:06:23,208
수염이 떨리고
긴 회색 몸뚱이는 두려움에 굳었다

1353
01:06:23,291 --> 01:06:26,666
그러자 사내는
아주 천천히 상체를 움직여

1354
01:06:26,750 --> 01:06:27,875
더 가까이 다가갔다

1355
01:06:27,958 --> 01:06:31,083
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
말이 나오지 않았다

1356
01:06:31,166 --> 01:06:34,666
몹시 불쾌한 일이 벌어질 것을
확신할 수 있었다

1357
01:06:34,750 --> 01:06:38,208
악랄하고 잔인한 광경을
봐야만 하는 것이다

1358
01:06:38,291 --> 01:06:41,583
두 얼굴 사이의 거리가
한 뼘 정도로 좁혀졌다

1359
01:06:41,666 --> 01:06:44,375
잔뜩 겁먹고 긴장한 쥐는
바닥에 납작 엎드렸다

1360
01:06:44,458 --> 01:06:45,833
쥐잡이 사내 역시 긴장했지만

1361
01:06:45,916 --> 01:06:49,416
잔뜩 당겨 놓은 용수철처럼
위험하고 적극적인 긴장감이었다

1362
01:06:49,500 --> 01:06:52,041
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

1363
01:06:52,125 --> 01:06:53,958
그러다 갑자기 달려들었다

1364
01:06:54,041 --> 01:06:55,083
마치 뱀이 공격하듯

1365
01:06:55,166 --> 01:06:57,916
칼을 날리듯 빠르게
머리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

1366
01:06:58,000 --> 01:07:00,041
하체 근육의 힘이었다

1367
01:07:00,125 --> 01:07:02,666
언뜻 입을 크게 벌리는 게 보였고

1368
01:07:02,750 --> 01:07:03,791
누런 앞니가 드러나며

1369
01:07:03,875 --> 01:07:06,541
입을 벌리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

1370
01:07:07,875 --> 01:07:09,791
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

1371
01:07:09,875 --> 01:07:12,208
그래서 눈을 감았는데
다시 눈을 떴을 땐

1372
01:07:12,291 --> 01:07:13,333
쥐는 죽어 있었다

1373
01:07:13,416 --> 01:07:15,958
쥐잡이 사내는
돈을 주머니에 넣더니

1374
01:07:16,041 --> 01:07:17,666
입안의 불순물을 뱉었다

1375
01:07:19,666 --> 01:07:21,791
달큰한 맛의 비결이 이겁니다

1376
01:07:21,875 --> 01:07:25,791
큰 공장이나 초콜릿 회사에선
쥐 피로 달큰한 맛을 만들죠

1377
01:07:25,875 --> 01:07:28,000
쥐 피 좀 먹는다고 안 죽어요

1378
01:07:30,708 --> 01:07:32,458
정말 역겹군요

1379
01:07:32,541 --> 01:07:35,000
사실입니다
두 분도 많이 먹었을 거예요

1380
01:07:35,083 --> 01:07:38,166
막대 초콜릿, 신발 끈 모양 사탕
전부 쥐 피로 만들어요

1381
01:07:38,250 --> 01:07:40,375
그런 얘긴 그만 듣고 싶군요

1382
01:07:40,458 --> 01:07:43,208
커다란 가마솥에 넣고
부글부글 끓이면서

1383
01:07:43,291 --> 01:07:45,333
기다란 막대로 저어대죠

1384
01:07:45,416 --> 01:07:47,875
초콜릿 공장의 중대한 비밀이라

1385
01:07:47,958 --> 01:07:51,791
피를 공급하는 쥐잡이 외엔
아는 사람이 없어요

1386
01:07:51,875 --> 01:07:54,291
사내는 청중이
자기편이 아님을 깨달았다

1387
01:07:54,375 --> 01:07:57,500
역겨움 가득한 우리의 얼굴은
분노로 시뻘게져 있었다

1388
01:07:58,583 --> 01:08:01,375
사내는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

1389
01:08:01,458 --> 01:08:06,041
우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
조용히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봤다

1390
01:08:06,125 --> 01:08:09,000
자갈을 밟는데도
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

1391
01:08:22,291 --> 01:08:23,125
이상하죠?

1392
01:08:24,000 --> 01:08:25,958
쥐들이 약에 적신 귀리를
안 먹었다니

1393
01:08:27,291 --> 01:08:31,208
건초더미 안에 뭔가
영양가 높은 게 있나 보네요

1394
01:08:47,666 --> 01:08:50,750
"40대 후반, 로알드 달은
아머샴 위스테리아 코티지에서"

1395
01:08:50,833 --> 01:08:53,333
"그 지역과 주민들을 보며
구상한 단막 소설"

1396
01:08:53,416 --> 01:08:56,708
"'클로드의 개'를 집필하며
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"

1397
01:08:56,791 --> 01:08:58,583
"'쥐잡이 사내'는 그중 한 편이다"

1398
01:09:03,166 --> 01:09:08,083
"독"

1399
01:09:15,958 --> 01:09:17,666
자정쯤 집에 도착했다

1400
01:09:18,625 --> 01:09:21,500
방갈로로 향하면서
헤드라이트를 껐다

1401
01:09:21,583 --> 01:09:24,625
불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가
해리 포프를 깨울까 봐 그랬는데

1402
01:09:24,708 --> 01:09:26,500
괜한 짓이었다
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

1403
01:09:27,166 --> 01:09:29,208
주차하고 현관으로 향했는데

1404
01:09:29,291 --> 01:09:32,708
계단이 남은 줄 알고 헛디딜까 봐
세어 가며 올라갔다

1405
01:09:32,791 --> 01:09:34,416
하나, 둘, 셋, 넷

1406
01:09:39,333 --> 01:09:42,208
해리의 방으로 가
조용히 문을 열고 들여다봤다

1407
01:09:42,291 --> 01:09:45,458
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
미동도 없이 고개도 안 돌렸지만

1408
01:09:45,583 --> 01:09:47,791
속삭이는 소리가 들렸고
알아듣기 힘들었다

1409
01:09:47,875 --> 01:09:48,750
도와줘

1410
01:09:48,833 --> 01:09:49,666
'도와줘'?

1411
01:09:52,625 --> 01:09:54,875
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

1412
01:09:54,958 --> 01:09:55,791
멈춰

1413
01:09:55,875 --> 01:09:56,750
'멈춰'?

1414
01:09:56,833 --> 01:10:00,125
쥐어짜는 듯한 소리라
뭐라는지 잘 안 들렸다

1415
01:10:00,708 --> 01:10:02,458
- 도와줘
- '도와줘'?

1416
01:10:02,541 --> 01:10:03,958
왜 그래, 해리?

1417
01:10:04,041 --> 01:10:06,041
신발 벗어

1418
01:10:06,916 --> 01:10:08,500
'신발 벗어'?

1419
01:10:09,041 --> 01:10:11,833
배에 총 맞은 후의
조지 발링 목소리 같았다

1420
01:10:11,916 --> 01:10:13,583
당시 그는 상자에 기대서서

1421
01:10:13,666 --> 01:10:16,375
배를 부여잡고
일본군 조종사를 욕했는데

1422
01:10:16,458 --> 01:10:19,458
지금의 해리처럼 쥐어짜며
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

1423
01:10:19,541 --> 01:10:21,791
물론 조지 발링은
그 후에 고꾸라져서

1424
01:10:21,875 --> 01:10:22,708
죽었다

1425
01:10:23,500 --> 01:10:24,500
신발 벗어

1426
01:10:25,208 --> 01:10:26,291
'신발 벗어'

1427
01:10:28,375 --> 01:10:30,958
영문은 모르겠지만
들어주기로 했다

1428
01:10:37,875 --> 01:10:39,500
- 왜 그래, 해리?
- 건드리지 마

1429
01:10:41,916 --> 01:10:45,291
해리는 몸의 3/4쯤을
홑이불로 덮고 반듯이 누워서

1430
01:10:45,375 --> 01:10:47,666
줄무늬 잠옷 차림에
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

1431
01:10:47,750 --> 01:10:49,916
더워서 나도 땀이 났지만
해리는 너무 심했다

1432
01:10:50,000 --> 01:10:51,916
얼굴이 번들거리고
베개는 푹 젖어 있었다

1433
01:10:52,500 --> 01:10:53,833
말라리아인 듯싶었다

1434
01:10:53,916 --> 01:10:55,250
- 왜 그래, 해리?
- 우산뱀

1435
01:10:55,333 --> 01:10:56,208
- 뭐?
- 우산뱀

1436
01:10:56,291 --> 01:10:57,625
- '우산'?
- 뱀 말이야

1437
01:10:58,833 --> 01:11:00,583
우산뱀한테 물렸어?
어딜? 언제?

1438
01:11:00,666 --> 01:11:01,500
아니야

1439
01:11:01,583 --> 01:11:02,416
뭐?

1440
01:11:06,041 --> 01:11:07,250
아직 안 물렸어

1441
01:11:09,291 --> 01:11:11,541
이해가 안 돼서
맹한 표정으로 해리를 보았다

1442
01:11:13,416 --> 01:11:16,250
우산뱀이 내 배에서 자고 있어

1443
01:11:18,833 --> 01:11:20,833
뒤로 펄쩍 물러났다
어쩔 수가 없었다

1444
01:11:20,916 --> 01:11:23,583
이불이 덮인 배 부분을
뚫어져라 봤지만

1445
01:11:23,666 --> 01:11:25,875
안에 뭐가 있는지는
알 수가 없었다

1446
01:11:26,916 --> 01:11:29,833
설마 지금 우산뱀이
자네 배 위에서 자고 있다고?

1447
01:11:29,916 --> 01:11:30,750
그래

1448
01:11:38,291 --> 01:11:39,333
어떻게 들어갔지?

1449
01:11:39,916 --> 01:11:43,208
괜한 질문이었다
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할걸

1450
01:11:44,625 --> 01:11:50,958
누워서 책을 읽는데
책 뒤쪽 가슴에 뭔가 느껴졌어

1451
01:11:51,041 --> 01:11:51,958
간지러웠지

1452
01:11:54,291 --> 01:11:59,750
그리고 작은 우산뱀이
잠옷 위로 올라오는 게 보였어

1453
01:12:00,583 --> 01:12:02,958
작아, 25cm쯤 되려나

1454
01:12:04,250 --> 01:12:08,541
움직이면 안 되니
그대로 얼어붙어 지켜봤지

1455
01:12:08,625 --> 01:12:12,166
이불 위로 움직일 줄 알았는데

1456
01:12:12,250 --> 01:12:13,750
해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

1457
01:12:13,833 --> 01:12:17,541
속닥대는 소리에 자고 있는 놈이
깨진 않을까, 관찰했다

1458
01:12:18,958 --> 01:12:20,458
속으로 들어가더라

1459
01:12:21,958 --> 01:12:26,000
배 부분에서 움직이는 게
잠옷 위로 느껴졌어

1460
01:12:27,125 --> 01:12:31,333
그러다 멈추더니 자는 거야

1461
01:12:35,208 --> 01:12:36,375
그래서 기다렸어

1462
01:12:37,291 --> 01:12:38,625
- 얼마나?
- 몇 시간쯤

1463
01:12:39,750 --> 01:12:42,583
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
기다리고 또 기다렸어

1464
01:12:42,666 --> 01:12:45,458
더는 못 버티겠어
기침 나올 것 같아

1465
01:12:48,875 --> 01:12:52,375
사실 우산뱀이라면
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

1466
01:12:52,458 --> 01:12:56,041
우산뱀은 민가 근처에서
따뜻한 곳을 찾곤 하니까

1467
01:12:56,125 --> 01:12:59,208
진짜 놀라운 건
아직 안 물렸다는 사실이었다

1468
01:12:59,291 --> 01:13:02,250
물릴 경우 당장 뱀을 잡고
해독제를 먹지 않으면

1469
01:13:02,333 --> 01:13:04,625
죽을 수 있을 만큼
치명적인 녀석이었다

1470
01:13:05,458 --> 01:13:07,541
작고 가는 우산뱀은
바로 이렇게 생겼다

1471
01:13:09,833 --> 01:13:11,791
아주 작은 틈이라도 있으면

1472
01:13:11,875 --> 01:13:15,583
어린아이의 침실 문 틈으로
아무도 모르게 들어갈 수 있다

1473
01:13:17,166 --> 01:13:21,375
어떤 차 농장 관리인이
뒷다리 물린 양 얘길 해줬었는데

1474
01:13:21,458 --> 01:13:25,750
사체의 몸을 갈라보니
피가 새까만 타르 같았단다

1475
01:13:29,916 --> 01:13:33,208
'그래, 해리' 내가 말했다
나도 속삭였다

1476
01:13:33,291 --> 01:13:35,625
'움직이지 말고
필요 없는 말도 하지 마'

1477
01:13:35,708 --> 01:13:38,333
'놀라게만 안 하면 안 물 거야
해결해 볼게'

1478
01:13:41,000 --> 01:13:44,750
나는 양말 바람으로 주방에 가서
작고 잘 드는 칼을 꺼냈다

1479
01:13:45,291 --> 01:13:49,500
혹시 우산뱀이 놀라 해리를 물면
곧장 쓸 수 있게 주머니에 넣었다

1480
01:13:49,583 --> 01:13:51,583
물린 곳을 째고
독을 빨아낼 작정이었다

1481
01:13:52,958 --> 01:13:54,750
'해리' 내가 말했다

1482
01:13:54,833 --> 01:13:58,750
'우선은 내가 이불을 살짝 걷고
안을 보는 게 최선일 것 같아'

1483
01:13:59,375 --> 01:14:01,375
멍청한 놈

1484
01:14:02,833 --> 01:14:06,708
목소리엔 감정이 없었다
너무 느리고 조용했으니까

1485
01:14:06,791 --> 01:14:10,125
대신 눈동자와 입꼬리에서
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

1486
01:14:10,750 --> 01:14:14,583
빛 때문에 놀라서 날 죽일 거라고

1487
01:14:16,583 --> 01:14:17,458
좋은 지적이네

1488
01:14:18,208 --> 01:14:20,458
이불을 확 들추고 휙 치워버릴까?

1489
01:14:20,541 --> 01:14:22,583
의사 불러

1490
01:14:24,375 --> 01:14:27,333
왜 너는 그런 생각을
못 하냐는 표정이었다

1491
01:14:27,416 --> 01:14:30,125
의사, 맞네, 그거야
간더바이 선생을 부를게

1492
01:14:30,208 --> 01:14:32,666
까치발을 들고 나가
간더바이의 번호를 찾은 다음

1493
01:14:32,750 --> 01:14:34,708
수화기를 들고 교환원을 재촉했다

1494
01:14:40,083 --> 01:14:41,541
선생님, 우즈 감독관입니다

1495
01:14:41,625 --> 01:14:43,458
안녕하십니까
아직 안 주무셨네요

1496
01:14:43,541 --> 01:14:45,666
지금 당장
우산뱀 해독제 갖고 와주세요

1497
01:14:45,750 --> 01:14:47,375
우산뱀 해독제를?
누가 물린 겁니까?

1498
01:14:47,458 --> 01:14:50,000
날카로운 외침에
귓속에서 폭탄이 터진 듯했다

1499
01:14:50,083 --> 01:14:51,208
아직 안 물렸고

1500
01:14:51,291 --> 01:14:54,166
지금 해리 이불 속 배 위에
한 마리가 자고 있어요

1501
01:14:54,250 --> 01:14:56,291
3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

1502
01:14:58,291 --> 01:15:02,000
이번엔 천천히 부드럽게
정확하게 간더바이가 말했다

1503
01:15:02,083 --> 01:15:04,958
움직이거나 말하면 안 돼요
알겠습니까?

1504
01:15:05,041 --> 01:15:06,958
- 그럼요
- 지금 가지요

1505
01:15:07,041 --> 01:15:08,583
전화를 끊고 다시 침실로 갔다

1506
01:15:11,500 --> 01:15:13,208
당장 옆으로 오라는 눈빛이었다

1507
01:15:13,291 --> 01:15:15,166
간더바이 선생이 온대
가만히 있으래

1508
01:15:15,750 --> 01:15:17,541
지금까진 뭘 했을 것 같대?

1509
01:15:17,625 --> 01:15:19,125
말도 하지 말래, 우리 둘 다

1510
01:15:19,208 --> 01:15:20,333
그럼 닥쳐

1511
01:15:21,333 --> 01:15:24,583
그 말을 하는데 입 한쪽 옆의
웃을 때 쓰는 근육이

1512
01:15:24,666 --> 01:15:28,750
바르르 떨리며 아래로 내려갔고
말을 끝낸 후에도 꽤 지속됐다

1513
01:15:29,333 --> 01:15:31,541
맘에 안 들었다
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고

1514
01:15:33,083 --> 01:15:35,166
의사의 차가 급히 들어왔다

1515
01:15:37,166 --> 01:15:38,333
마중 나갔다

1516
01:15:41,583 --> 01:15:42,625
어디 있습니까?

1517
01:15:42,708 --> 01:15:46,125
의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
날 지나 복도로 들어가

1518
01:15:46,208 --> 01:15:47,708
의자에 가방을 놓았다

1519
01:15:47,791 --> 01:15:49,791
바닥이 푹신한
침실용 슬리퍼를 신은 채

1520
01:15:49,875 --> 01:15:52,791
고양이처럼 부드럽게
조용히 방을 가로질렀다

1521
01:15:52,875 --> 01:15:54,875
해리는 곁눈으로 선생을 보았고

1522
01:15:54,958 --> 01:15:57,625
선생은 침대 옆으로 가
미소 지으며 해리를 내려다봤다

1523
01:15:57,708 --> 01:15:59,833
안심시키는 얼굴로 끄덕이는데
이런 말을 하는 듯했다

1524
01:15:59,916 --> 01:16:03,083
간단한 일이니 걱정 마시고
이 간더바이한테 맡기세요

1525
01:16:03,166 --> 01:16:05,375
그러곤 주방으로 갔고
나도 따라갔다

1526
01:16:07,125 --> 01:16:08,125
가방을 열었다

1527
01:16:08,208 --> 01:16:12,166
일단 해독제를 주사해야 하는데
움직이지 않게 조심해야 돼요

1528
01:16:12,250 --> 01:16:14,500
한 손엔 주사기를
한 손엔 작은 병을 들고는

1529
01:16:14,583 --> 01:16:17,333
병에 바늘을 꽂고
연노랑색 액체를 뽑아서

1530
01:16:17,416 --> 01:16:19,875
- 내게 건넸다
- 갖고 있다가 말하면 주세요

1531
01:16:19,958 --> 01:16:21,166
선생은 방으로 돌아갔다

1532
01:16:26,291 --> 01:16:28,416
크게 뜬 해리의 눈동자가 빛났다

1533
01:16:28,500 --> 01:16:30,916
선생은 조심스럽게
해리의 잠옷 소매를 걷어

1534
01:16:31,000 --> 01:16:32,833
팔을 움직이지 않고
팔꿈치까지 올렸다

1535
01:16:32,916 --> 01:16:35,208
침대에서 살짝 떨어진 채
속삭이기를…

1536
01:16:35,291 --> 01:16:38,416
주사를 놓을 겁니다
좀 따끔하겠지만 움직이지 말고

1537
01:16:38,500 --> 01:16:41,166
배에 힘도 주지 마시고
몸에 힘 빼고 계세요

1538
01:16:41,250 --> 01:16:44,125
주사기를 본 해리의
웃음 근육이 또 씰룩거렸다

1539
01:16:45,708 --> 01:16:49,291
선생은 고무관으로
해리의 위쪽 팔뚝을 묶고

1540
01:16:49,375 --> 01:16:51,958
아래쪽 팔뚝의 한 부분을
알코올 솜으로 닦았다

1541
01:16:52,041 --> 01:16:53,583
그리고 주사기를 들어

1542
01:16:53,666 --> 01:16:56,291
실눈으로 눈금을 보면서
노란 액체를 조금 뿜어냈다

1543
01:16:56,375 --> 01:16:58,250
땀 범벅인 해리의 얼굴은

1544
01:16:58,333 --> 01:17:01,833
크림을 듬뿍 바른 듯 번들거렸고
땀이 베개로 흘러내렸다

1545
01:17:01,916 --> 01:17:05,458
지혈대 아래쪽 팔뚝에
부풀어 오른 파란 정맥이 보였다

1546
01:17:05,541 --> 01:17:08,833
간더바이는 주삿바늘을
팔뚝에 납작하게 대더니

1547
01:17:08,916 --> 01:17:11,250
피부를 포 뜨듯 찔러
정맥에 집어넣었다

1548
01:17:11,333 --> 01:17:14,166
흔들림 없이 천천히
치즈에 찌르듯 부드럽게

1549
01:17:14,250 --> 01:17:17,208
해리는 천장을 보며
눈을 깜빡일 뿐 움직이진 않았다

1550
01:17:17,291 --> 01:17:19,583
간더바이는 몸을 숙여
해리의 귀에 입을 갖다 댔다

1551
01:17:19,666 --> 01:17:23,791
이젠 혹시 물려도 괜찮겠지만
움직이지 마세요, 곧 오죠

1552
01:17:24,500 --> 01:17:27,541
- '이제 안전한가요?' 내가 물었다
- 아뇨, 반반입니다

1553
01:17:27,625 --> 01:17:30,416
선생은 이마를 닦으며
입술을 깨물었다

1554
01:17:30,500 --> 01:17:33,458
방도가 있을 거다

1555
01:17:33,541 --> 01:17:36,125
조용히 되뇌며 머리를 짜냈다

1556
01:17:38,208 --> 01:17:41,666
마취제를 사용하는 게 좋겠습니다

1557
01:17:42,375 --> 01:17:45,000
그 짐승이 있는 곳에요

1558
01:17:46,875 --> 01:17:48,333
훌륭한 제안이었다

1559
01:17:48,416 --> 01:17:49,375
좀 위험할 겁니다

1560
01:17:49,458 --> 01:17:53,125
뱀 같은 냉혈 동물은
마취 속도가 느리거든요

1561
01:17:53,208 --> 01:17:55,083
근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

1562
01:17:55,166 --> 01:17:57,125
- 에테르, 클로로폼?
- 난 끄덕였다

1563
01:17:57,208 --> 01:17:59,583
- 어떤 걸로 하지?
- 내게 묻는 건가? 모르겠다

1564
01:17:59,666 --> 01:18:00,500
클로로폼!

1565
01:18:01,083 --> 01:18:02,875
선생은 내 팔을 잡아끌고
현관으로 갔다

1566
01:18:04,458 --> 01:18:07,291
내 집으로 가세요
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

1567
01:18:07,375 --> 01:18:09,291
이건 독성 약품 선반 열쇠예요

1568
01:18:09,375 --> 01:18:12,750
클로로폼 병엔 오렌지색 라벨에
이름이 적혀 있을 겁니다

1569
01:18:12,833 --> 01:18:15,291
난 혹시 모르니 여기 있죠
빨리 가요!

1570
01:18:15,916 --> 01:18:17,541
- 신발을…
- 안 신어도 돼요

1571
01:18:20,250 --> 01:18:23,166
나는 빠르게 차를 몰아
15분 만에 약을 가져왔다

1572
01:18:26,250 --> 01:18:29,916
계획을 말해주긴 했는데
당연한 일이지만 잔뜩 겁먹어서

1573
01:18:30,000 --> 01:18:32,083
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습니다

1574
01:18:35,791 --> 01:18:38,666
해리는 아까 그 자세로
침대에 누워 있었다

1575
01:18:38,750 --> 01:18:42,041
땀 범벅이 된 새하얀 얼굴로
눈을 굴려 날 보았다

1576
01:18:42,125 --> 01:18:43,833
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

1577
01:18:43,916 --> 01:18:46,666
선생은 지혈대로 썼던
고무관을 집어 들고

1578
01:18:46,750 --> 01:18:48,958
한쪽 끝에 종이 깔때기를 끼웠다

1579
01:18:49,041 --> 01:18:52,666
그리고 이불 한쪽을 살짝 들어
고무관을 넣고는

1580
01:18:52,750 --> 01:18:55,333
해리의 몸쪽으로 밀어 넣었다

1581
01:18:56,125 --> 01:18:58,541
몇 cm 집어넣는 데에
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다

1582
01:18:58,625 --> 01:19:00,375
20분, 혹은 40분

1583
01:19:00,458 --> 01:19:03,875
고무관은 안 움직이는 듯했지만
보이는 부분이 점점 줄긴 했다

1584
01:19:04,375 --> 01:19:06,333
선생도 땀을 흘리기 시작했고

1585
01:19:06,416 --> 01:19:08,875
이마와 인중에 땀방울이 맺혔지만

1586
01:19:08,958 --> 01:19:10,291
손은 전혀 떨림이 없었고

1587
01:19:10,375 --> 01:19:13,291
눈은 해리의 배를 덮은
이불에 고정돼 있었다

1588
01:19:13,375 --> 01:19:15,375
그대로 클로로폼을 달라고
내게 손을 내밀었다

1589
01:19:15,458 --> 01:19:17,125
나는 뚜껑을 비틀어 연 다음

1590
01:19:17,208 --> 01:19:20,500
선생이 병을 제대로 쥐는 걸
확인한 후에야 병을 놓았다

1591
01:19:21,666 --> 01:19:25,958
포프 씨, 매트리스가 젖으면
몸이 차가워질 겁니다

1592
01:19:26,041 --> 01:19:27,375
마음 단단히 먹고 가만히…

1593
01:19:27,458 --> 01:19:28,666
빨리해요!

1594
01:19:29,291 --> 01:19:31,000
해리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

1595
01:19:31,083 --> 01:19:34,208
선생은 해리를 잠시 노려보고
하던 일을 계속했다

1596
01:19:34,291 --> 01:19:37,541
깔때기에 액체를 조금 붓고
관을 따라 내려가길 기다렸다

1597
01:19:37,625 --> 01:19:38,916
좀 더 붓고 또 기다렸다

1598
01:19:47,541 --> 01:19:50,666
역겹고 강렬한 클로로폼 냄새가
온 방에 퍼지면서

1599
01:19:50,750 --> 01:19:52,500
희미하고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다

1600
01:19:52,583 --> 01:19:55,708
하얀 수술대가 있는 하얀 방
간호사들과 의사들

1601
01:19:55,791 --> 01:19:57,375
선생은 계속 액체를 따랐고

1602
01:19:57,458 --> 01:20:01,041
그 끔찍한 액체의 짙은 증기가
종이 깔때기에서 피어올랐다

1603
01:20:02,083 --> 01:20:05,166
선생은 잠시 멈췄다 더 따르더니
내게 병을 건네고는

1604
01:20:05,250 --> 01:20:07,583
고무관을 천천히 빼내고 일어났다

1605
01:20:07,666 --> 01:20:10,250
작업의 긴장도가
얼마나 대단했던지

1606
01:20:10,333 --> 01:20:12,583
날 돌아보며 말하는데
목소리가 이러했다

1607
01:20:12,666 --> 01:20:14,791
혹시 모르니 15분 기다립시다

1608
01:20:14,875 --> 01:20:16,291
난 해리에게 전달하려 했다

1609
01:20:16,375 --> 01:20:17,291
혹시 모르니 15분…

1610
01:20:17,375 --> 01:20:18,291
들었어!

1611
01:20:18,375 --> 01:20:21,666
이번엔 선생도 깜짝 놀랐고
작은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

1612
01:20:21,750 --> 01:20:25,125
그가 매섭게 노려보자
해리의 웃음 근육이 또 씰룩댔다

1613
01:20:25,208 --> 01:20:26,958
침대 옆에서 기다리는 15분 내내

1614
01:20:27,041 --> 01:20:29,916
선생은 호기심 가득하고
사람을 휘어잡는 강렬한 눈빛으로

1615
01:20:30,000 --> 01:20:31,541
해리를 응시했으며

1616
01:20:31,625 --> 01:20:33,250
해리를 꼼짝 못 하게 하고

1617
01:20:33,333 --> 01:20:35,875
조용히 있게 하는 데에
온 힘을 집중했다

1618
01:20:35,958 --> 01:20:38,583
눈을 절대 떼지 않았으며
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

1619
01:20:38,666 --> 01:20:41,125
이렇게 외치는 듯 보였다

1620
01:20:41,208 --> 01:20:43,000
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마

1621
01:20:43,083 --> 01:20:45,375
일을 그르치면 절대 안 돼
알아들었나?

1622
01:20:46,416 --> 01:20:48,583
침묵 속에 입술을 씰룩이는 해리

1623
01:20:48,666 --> 01:20:50,750
땀을 흘리며
눈을 감았다가, 떴다가

1624
01:20:50,833 --> 01:20:52,875
날 봤다가, 이불을 봤다가
천장을 봤지만

1625
01:20:52,958 --> 01:20:54,541
선생 쪽은 보지 않았다

1626
01:20:54,625 --> 01:20:56,750
그래도 간더바이 선생은
일에 집중했다

1627
01:20:58,375 --> 01:21:00,416
옆에서 누가
거대한 풍선을 부는데

1628
01:21:00,500 --> 01:21:03,125
곧 터질 것 같지만
외면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

1629
01:21:03,208 --> 01:21:06,166
마침내 선생이 끄덕였다
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였다

1630
01:21:06,833 --> 01:21:08,041
침대 반대쪽으로 가세요

1631
01:21:08,125 --> 01:21:10,791
시트 양쪽을 잡고
함께 벗겨낼 겁니다

1632
01:21:10,875 --> 01:21:13,000
아주 천천히 하세요
포프 씨는 가만히 계시고요

1633
01:21:24,250 --> 01:21:26,541
해리의 가슴 부분이
완전히 드러났다

1634
01:21:26,625 --> 01:21:30,083
잠옷 바지 끈이 나비 모양으로
얌전히 묶여 있는 게 보였다

1635
01:21:30,166 --> 01:21:32,875
조금 더 아래쪽엔
자개단추가 달려 있었는데

1636
01:21:32,958 --> 01:21:34,791
잠옷 바지 앞섶에 단추라니

1637
01:21:34,875 --> 01:21:37,000
난 자개는커녕
단추 달린 건 입어본 적도 없다

1638
01:21:37,583 --> 01:21:39,958
이런 순간에
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라니

1639
01:21:40,500 --> 01:21:42,125
배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

1640
01:21:45,041 --> 01:21:46,208
가만히 계세요, 포프 씨

1641
01:21:46,291 --> 01:21:49,250
선생은 해리의 몸통과
다리 아래를 유심히 살폈다

1642
01:21:49,333 --> 01:21:52,125
조심하세요
바지 속으로 들어갔을지 몰라요

1643
01:21:52,208 --> 01:21:53,041
해리가 일어났다

1644
01:21:55,250 --> 01:21:56,625
처음으로 움직였다

1645
01:21:58,083 --> 01:22:00,916
벌떡 일어나 서더니
양쪽 다리를 격하게 흔들었다

1646
01:22:01,000 --> 01:22:04,250
우린 물린 줄 알았고
선생은 메스와 지혈대를 찾았다

1647
01:22:04,333 --> 01:22:07,958
그런데 해리가 멈춰 서더니
침대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

1648
01:22:08,041 --> 01:22:08,916
없어!

1649
01:22:09,000 --> 01:22:10,958
선생이 고개를 들고
해리를 쳐다봤다

1650
01:22:11,666 --> 01:22:12,791
해리는 무사했다

1651
01:22:12,875 --> 01:22:15,916
물리지도 않았고
물려 죽을 일도 없었다

1652
01:22:16,000 --> 01:22:17,125
이제 모두 해결됐다

1653
01:22:17,708 --> 01:22:18,583
그런 듯했다

1654
01:22:19,625 --> 01:22:21,333
꿈을 꾸셨나 봅니다, 포프 씨

1655
01:22:30,416 --> 01:22:34,125
비아냥거릴 의도가 없었다는 걸
난 알고 있었다

1656
01:22:34,208 --> 01:22:36,291
극도의 긴장감이 풀려
헛웃음이 나온 것이다

1657
01:22:36,375 --> 01:22:39,083
해리 생각은 달랐다
줄무늬 잠옷 바람으로 서서

1658
01:22:39,166 --> 01:22:41,958
선생을 노려보는 그의 뺨이
점점 시뻘게졌다

1659
01:22:42,041 --> 01:22:44,291
내가 거짓말쟁이라는 건가?

1660
01:22:47,083 --> 01:22:49,500
선생은 꼼짝 않고
해리를 바라보았다

1661
01:22:49,583 --> 01:22:52,791
해리가 눈을 번뜩이며
침대 위에서 한 발 다가섰다

1662
01:22:53,958 --> 01:22:56,333
더러운 벵골 시궁쥐 같은 게

1663
01:22:56,416 --> 01:22:57,458
'닥쳐, 해리' 내가 말했다

1664
01:22:57,541 --> 01:22:59,791
- 이 더럽고 시커멓고 하찮은…
- 닥치라니까!

1665
01:22:59,875 --> 01:23:01,333
- 천민 주제에
- 닥쳐!

1666
01:23:01,416 --> 01:23:02,291
그만!

1667
01:23:05,708 --> 01:23:08,458
선생은 방에서 나갔고
나도 따라나섰다

1668
01:23:08,541 --> 01:23:10,666
내가 말했다, '정신이 나가서
아무 말이나 한 거예요'

1669
01:23:10,750 --> 01:23:14,041
우린 암흑 속에 진입로를 지나
선생의 낡은 모리스 자동차로 갔다

1670
01:23:14,125 --> 01:23:14,958
"대영제국 황마 농장"

1671
01:23:15,041 --> 01:23:15,875
선생이 차에 탔다

1672
01:23:15,958 --> 01:23:18,666
'정말 훌륭하셨어요' 내가 말했다
'그 친구를 살리셨습니다'

1673
01:23:18,750 --> 01:23:20,833
- 그건 아니죠
- 그래도 어쩌면…

1674
01:23:20,916 --> 01:23:24,250
어쨌든 은인이세요
해리 생명의 은인이라고요

1675
01:23:24,333 --> 01:23:25,625
아닙니다

1676
01:23:28,208 --> 01:23:29,125
미안합니다

1677
01:23:30,583 --> 01:23:31,416
그럴 리가요

1678
01:23:38,916 --> 01:23:41,416
간더바이 선생은
시동을 걸고 가버렸다

1679
01:23:54,500 --> 01:23:57,791
"달은 1950년 1월에
'독'을 쓰기 시작했다"

1680
01:23:57,875 --> 01:23:59,583
"'우즈'라는 이름은"

1681
01:23:59,666 --> 01:24:01,500
"애선스 전투에서 전사한"

1682
01:24:01,583 --> 01:24:05,125
"제80 비행대대 동료 파일럿의
이름에서 따왔다"

1683
01:24:24,750 --> 01:24:28,666
소설가 지망생이 가져야 할
혹은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

1684
01:24:28,750 --> 01:24:31,041
능력들을 소개하려 합니다

1685
01:24:32,375 --> 01:24:34,750
생생한 상상력이 필요합니다

1686
01:24:36,166 --> 01:24:38,125
글을 잘 써야 하지요

1687
01:24:38,208 --> 01:24:39,166
다시 말해

1688
01:24:39,250 --> 01:24:43,375
독자의 머릿속에 생생한 장면을
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

1689
01:24:43,458 --> 01:24:47,125
누구나 가진 능력은 아니고
타고나는 재능이라

1690
01:24:47,208 --> 01:24:49,208
가진 사람도, 못 가진 사람도 있죠

1691
01:24:50,041 --> 01:24:52,750
열정이 있어야 합니다
다시 말하자면

1692
01:24:52,833 --> 01:24:56,500
하고자 하는 일에 몰두하며
포기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하죠

1693
01:24:57,458 --> 01:24:59,041
몇 시간이고

1694
01:25:00,625 --> 01:25:02,166
며칠이고

1695
01:25:04,166 --> 01:25:05,375
몆 주고

1696
01:25:07,291 --> 01:25:09,083
몇 달이고

1697
01:25:10,333 --> 01:25:14,166
몇 년이고 버텨야 합니다

1698
01:25:15,416 --> 01:25:17,833
완벽주의자여야 합니다

1699
01:25:17,916 --> 01:25:21,500
자신이 쓴 글에
절대 만족하지 말고

1700
01:25:21,583 --> 01:25:26,583
다시 쓰고, 또 다시 써서
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죠

1701
01:25:27,458 --> 01:25:29,500
자신에게 엄격해야 합니다

1702
01:25:29,583 --> 01:25:32,791
혼자 일하며
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으니

1703
01:25:33,791 --> 01:25:37,666
출근 안 한다고
채찍질할 사람도 없고

1704
01:25:37,750 --> 01:25:40,166
요령 피운다고
나무랄 사람도 없으니까요

1705
01:25:41,000 --> 01:25:44,041
유머 감각이 뛰어나면
큰 도움이 됩니다

1706
01:25:44,125 --> 01:25:46,875
독자층이 성인이라면
꼭 필요한 덕목이고

1707
01:25:46,958 --> 01:25:49,083
어린이라면 없어선 안 되죠

1708
01:25:50,333 --> 01:25:51,458
마지막으로

1709
01:25:54,000 --> 01:25:56,000
적당한 겸손은 필수입니다

1710
01:25:58,208 --> 01:26:00,375
본인 작품이 훌륭하다고
자부하는 작가는

1711
01:26:01,791 --> 01:26:03,125
고난을 면치 못하죠

1712
01:26:15,041 --> 01:26:20,041
자막: 여리나

